매실과 파초 그리고 늦잠
매실과 파초 그리고 늦잠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6.0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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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매화나무는 꽃으로는 봄을 알리고, 열매로는 여름을 알리는 계절의 전령사이다. 매실은 특이하게도 빨갛게가 아니라 파랗게 익어간다. 과연 여름을 알리는 열매답지 않은가? 물론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것은 매실만이 아니다. 온갖 초목들이 진초록의 이파리를 드리우는 것 또한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남송(南宋)의 시인 양만리(楊萬里)는 파란 기운의 초여름 풍광을 통해 인생을 관조(觀照)했다.

 

◈ 한가히 사는 초여름 오후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閑居初夏午睡起)

梅子留酸軟齒牙(매자류산연치아) : 매실의 신맛이 남아 치아를 무르게 하고

芭蕉分綠與窓紗(파초분록여창사) : 파초는 초록빛을 나누어 비단 창문에 주는구나

日長睡起無情思(일장수기무정사) : 해 길어 잠에서 깨어 아무런 생각 없이

閑看兒童捉柳花(한간아동착유화) : 한가로이 아이들이 버들 꽃 잡는 것을 보는구나



※ 매화나무에 꽃은 진작 져버렸고, 그 자리에 파랗게 열매가 맺었다. 그 열매는 통통하니 살이 붙었고, 맛을 보면 시큼한 기운이 물씬하다. 단단한 치아(齒牙)를 무르게 할 정도이니 그 시큼함이 어떠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얼마 전 우연히 매실을 깨물었는데, 그 신 맛이 입 속에 남아 시인의 치아를 무르게 한 것이다. 이에 시인은 여름이 온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였던지, 창 밖에 훌쩍 자란 파초(芭蕉) 잎이 거들고 나섰다.

춘삼월(春三月)을 지나면서 차츰차츰 키를 키우고 녹색 물감을 날마다 조금씩 몸에 둘러 왔다. 키는 어느덧 창문에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자랐고, 빛깔은 이미 진한 녹색이 되었다. 그 진한 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니, 반을 뚝 떼어내 창문의 비단 휘장을 진초록으로 물들일 정도이다. 물론 창문의 비단 휘장이 녹색인 것은 파초 잎과는 아무 상관도 없겠지만, 시인의 감수성으로는 그게 그런 게 아니었다. 안방에 드리워진 비단 휘장의 녹색 빛깔이 오늘 따라 더욱 선명했고, 시인은 이것을 보자 즉시 창문 밖에 있는 파초에 생각이 미치었다.

파초가 자신의 잎을 물들이고 남은 진초록 물감을 가지고 창문의 비단 휘장마저도 물들인 것이 분명하다고 느낀 시인의 감수성은 참으로 탁월하다. 여름의 현상 중 하나는 해가 부쩍 길어진다는 것이다. 여름이 되면, 해가 일찍 뜨기 때문에 아침잠이 많은 시인은 자연스레 해가 떠서야 침상에서 일어나게 된다. 늦은 잠에서 깨어난 시인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에 있다. 그리고는 부지런한 아이들이 버들 꽃을 손으로 잡는 것을 한가로이 바라본다. 여름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호사(豪奢)가 아닐 수 없다. 시인에게는 여름이야말로 인생을 관조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인 것이다.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매실이 파랗게 익은 모습이 그 이유일 수도 있고, 치아를 무르게 할 만큼 시큼한 매실의 맛이 이유일 수도 있다. 또한 창문 밖에 자라난 파초가 그 잎이 진초록 색을 띠게 되는데, 그 빛깔이 어찌나 짙던지 창문의 비단 휘장까지도 진초록으로 물들일 정도이다. 이것이 이유일 수도 있다. 해가 중천에 뜨고 난 뒤 잠에서 깨어나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아이들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이 밖에도 여름을 좋아할 이유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문제는 좋아하는 마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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