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관(題款)의 멋
제관(題款)의 멋
  • 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4.05.2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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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강희진 <수필가>

얼마 전 대만으로 여행을 갔었다. 대만 국립 박물관에 들러 그림전시를 봤다. 명나라 시대의 화가 문징명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문외한인 내가 봐도 참 멋진 그림이다.

그림 위에 써진 글자(제관)의 해석을 부탁하자 가이드가 해석해 주었는데 해설을 듣고 나니 더욱 한층 더 멋스럽게 보였다. 그 중 알 수 없는 건 그림 위에 찍힌 도장이었다. 어떤 그림은 정중앙에 또 어떤 그림에는 여러 개의 도장이 찍혀 있기도 했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가운데 큰 도장이 황제의 것이라며 그로써 얼마나 대단한 그림인지를 알 수 있는 게 특징이라고 했다. 그럼 나머지 도장은 무엇인지, 의문만 품은 채 여행을 다녀온 직후 이번 학기에 수강한 ‘동양화 감상과 비평’을 듣고 나니 의혹이 풀렸다.

제관은 간단히 말해 화면 위에 쓴 문자라는 뜻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화제(畵題)를 쓸 수도 있고 제시(齊詩)를 쓸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제관과 도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요리에 양념을 넣는 것은 제관을 쓰고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데 양념을 넣지 않아도 또한 훌륭한 요리이지만 양념을 넣으면 색, 향, 맛이 증가하는데 어찌 넣지 않을 수 있겠는가?” 즉 그림을 그리고 화제와 도장을 잘 찍음으로써 그 그림이 금상첨화 화룡점정의 작용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관과 도장은 화면에 변화가 부족할 때 보충해 주고, 화면의 균등을 유지하고 경중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제관과 도장은 동양화의 독특한 양식인데 제관을 중시하는 작가들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제관의 위치를 고려해서 그린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제관을 잘하면 글씨 하나가 그림 속 천 개의 꽃에 못지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제관도 과하면 그림을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나라 장수중의 그림 ‘복사꽃과 새’는 제발(題跋), 그림감상 시문을 쓴 사람이 무려 28명에 이르고 명나라 동기창의 그림에는 그림을 수장한 사람들의 제관이 무려 842자에 달하고 수장했던 사람들의 도장이 63개나 찍혀 있어 누더기 그림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나라 김정희의 그림‘불이선란’에도 여기저기 수장했던 사람들의 도장이 찍혀 있다. 도장 하나, 제관 하나로 그 그림의 완성도가 달라진다. 행서로 쓸 것인가 혜서로 쓸 것인가? 네모난 도장 혹은 둥근 도장이 괜찮을까? 큰 도장 대신 작은 도장이 좋을 것인가? 등등을 고민했다. 도장에 새긴 문구 또한 화가의 이름뿐 아니라 그림에 맞는 시구를 새겨 넣고 찍었다 하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이렇게 화가의 혼을 녹여 완성한 그림인데 후대 사람들이 덧칠한 욕심과 허영이 그만 값어치를 떨어뜨려 버린 것이다.

아름답고 멋진 그림을 소장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도장 하나를 찍고 제관을 한 것이 그림의 구도를 망친다. 단순한 욕심으로 찍은 도장 하나가 그림의 질서를 파괴하듯 우리도 살아가면서 다스리지 못한 욕심이 무수한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단순히 자기충족을 위한 도구로 삼을 때도 추한 게 욕심이고 살면서 일어나는 문제의 원인은 대부분 소유욕에서 비롯되는 건 알았지만 작가의 예술혼이 깃든 그림에까지 작용하는 것은 도를 넘어선 탐욕이 아닐까 싶다.

지난번에 출판하면서 도장하나를 새겼다. 온갖 문체를 적용해 이름을 새겨 넣었는데 진즉 도장의 멋을 알았다면 이름 대신 책 속의 글을 빛나게 해 줄 그런 문구를 넣어 새길 걸 하는 아쉬움이 잠깐 들었다. 이것 또한 욕심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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