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없는 박물관(1)
지붕 없는 박물관(1)
  •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4.05.11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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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사계절 주는 감동이 다르고 아침과 저녁의 표정이 달라지는 곳. 그리고 여러가지 유물 유적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청원군의 작은 민속촌.

아침에 출근할 때면 대청호수가 햇빛에 반사되어 고기 비늘처럼 은빛으로 반짝이고 저녁노을이 질 때면 붉은 석양빛이 황홀 그 자체다. 1980년 건설된 다목적 댐인 대청댐이 만들어지면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고향을 잃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고, 물속에 잠길 위기에 처해있던 문화유적들을 양성산 기슭으로 옮겨 이전 복원해 놓은 곳. 바로 문의 문화재단지다. 양성산((養性山)은 신라시대 때 화은대사라는 큰 스님이 이곳에서 승병을 양성하던 곳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 양성산 중턱에는 신라 자비왕 17년에 축성된 양성산성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충북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산성이 많은 고장이다. 지금도 2~3시간이면 전국 어디든 갈 수 있을 만큼 교통의 요지이고 삼국시대 때도 삼국의 접경지역이다 보니 이 땅을 차지하려던 싸움이 아주 치열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그래서 내 땅을 남의 나라에 빼앗기지 않고 내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성이 유난히 많은 고장이 되었다. 지금 현재 발견된 성(城)만 해도 120여 개가 넘는다고 하니 아마도 그 말이 과언이 아니다.

양성문을 들어서면 호수를 바라보며 솟대가 날아갈 듯 서 있다. 솟대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마을 어귀나 길가에 세웠다. 대부분 솟대의 새는 땅에서도 살고 날아다니기도 하는 오리를 주로 세웠는데 하늘과 땅 사이의 인간을 연결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하는 신성한 중재자로 여겼다. 또 솟대의 머리모양이 어느 방향을 향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솟대를 지나면 기자석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예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자식을 점지해 주십사하고 빌던 이 바위는 다산과 번식을 상징하며 남근석이라고도 불린다.

문의 문화재단지는 여러 채의 민가가 있지만,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에서 옮겨온 민가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에 멈춰버린 사진 같은 민가와 함께 자리한 양반가. 옛날 사대부가 살았던 양반집은 들어가는 문조차도 민가와는 사뭇 다르다. 우선 솟을대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솟을 문은 보기에도 위로 높이 솟아 위엄이 느껴지는데 양반이라고 해서 모두 솟을대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대부 이상의 벼슬을 한 양반만이 할 수 있는 대문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이런 전통이 대부분 무너졌지만 옛날에는 ‘대문이 곧 그 집의 가문이다’ 라고 할 만큼 대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신분이 높다 보니 걸어서 출입하지 않고 말이나 가마를 타고 출입을 했기 때문에 대문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양반집도 민가 못지않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옥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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