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잘 보이던 것들이 환한 빛 아래서 아련해지고
어둠에 잘 보이던 것들이 환한 빛 아래서 아련해지고
  •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 승인 2014.04.15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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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썩은 대추나무둥치로 도깨비놀이 하던 남자애들은 건너 마을이나 아랫마을로 T.V를 보러 다녔습니다. 평상에서 참외. 수박. 옥수수를 먹던,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마을에 전기불이 들어오던 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녁 내 마을의 모든 개들이 일제히 미친 듯 짖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밝음에 놀란 듯 개들은 여간해선 짖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T.V를 들여놓은 집들은 드라마나 뉴스를 보러오는 이웃으로 인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남자애들은 즐겨보던 마징가로봇처럼 주먹을 날리며 패거리로 뭉쳤습니다. 스위치만 올리면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 앞으로 마을 인심도 발 빠르게 이웃집 텃밭으로 길을 내고, T.V 크기만큼이나 동무들 마음도 크고 작게 움직이는 듯 했습니다. 줄어든 밤 시간 보다 넓게 신작로에 아스팔트가 깔리는가 싶더니 처마 밑에 매단 마늘이 없어지고, 참깨가 털리고, 달리는 차에 경운기가 넘어지고, 드디어는 외양간의 소가 밤사이 사라지는 일도 생겼습니다.

아침이면 마을회관 앞으로 어른들의 묵중한 발걸음이 모여 궁시렁 궁시렁 대책 없는 대책을 논했습니다. 나 어릴 적 70년대 시골에 전기불이 들어오면서 집 지킴이었던 개들은 쓸모가 없어선지 툭하면 나무아래서 끄슬리는 일이 잦았습니다. 마을의 가구 수가 줄어들자 학교의 학생 수가 줄고, 마을인심이나 이웃 간의 인정도 줄었던지 다 알 순 없지만, 봄이면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에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고. 바구니 대신 비닐봉지를 들고 나물을 캐기 위해 먼 친정마을까지 가게 되는 계절입니다.

잘 가꾼 두릅을 꺾어줄 아버님도 이젠 아니 계시지만, 여주의 후포 고개를 넘어서면, 기억이 몸보다 빠르게 과거 속으로 달려갑니다. 이제는 가산마루로 이름까지 바뀐 길을 걸으며 꽃멀미가 납니다. 천천히 한 가지씩 꽃을 피워야 새롭게 향기로운 시간을 누릴 텐데. 생강나무 꽃이 피기 무섭게 벚, 매화, 복숭아, 개나리, 목련. 조팝, 라일락, 배꽃…,등이 일제히 피어나니 이때를 놓칠세라 꽃구경 나온 걸음마다 꽃멀미를 하는 것입니다.

날씨가 급작스레 따스해져 꽃을 피우는 나무들도 쥐나도록 물올림을 했을 겁니다. 좀 더 따스해지고 꽃이 많아지면 벌을 차지하지 못할까봐 봄꽃나무는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고 하는데, 한꺼번에 꽃핀 나무들, 올 한 해 열매도 걱정입니다. 꽃길 너머로 늦게 논둑을 태우는 아지랑이 속 풍경이 일렁거립니다. 너울거리는 아지랑이들은 옷을 홀딱 벗어버린 투명인간이며 봄의 정령입니다. 내 볼이 아지랑이에 뺨 맞아, 발개지며 화끈 얼얼합니다.

꽃길을 걸으며 생각합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것은 볼 수가 없어서, 마음을 들여다 볼 수가 없어서 우리는 보이는 아름다움에 어지럽고 황홀해 하는 게 아닌가 하고요. 그리하여 우리는 아름다움을 취하고 싶어 자꾸 문명을 발달시켜 문명의 꽃을 피우는 게 아닌가 하고요. 그러나 편리한 문명이 발달할 수록 인간과 자연의 순리가 멀어지는 것이라면, 돈이 많을 수록 인간미가 없어지고 인정이 메말라지는 것이라면, 물질과 문명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고독 때문에 질식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은 자명할 것입니다. 지난주에 본 영화 <노아>에서 ‘노아’는 생명을 존중하며 자연을 벗 삼아 자연처럼 살다가 신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성경의 새로운 다른 해석이란 논란까지 불러 온 영화를 보고 나서, 밀려오는 감동에 먹먹했습니다. 감독은 인간의 지혜와 문명이란, 삶과 구원에 아무소용 없음을 알리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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