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비소리
숨비소리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4.04.15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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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꿀벌들의 잔치가 시작되었다. 사방에서 ‘잉잉- 앵앵-’ 분주하고 소란스럽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꽃 저 꽃 들락거리는 모양새가 어지러워도 나름대로 질서가 있다.

꽃잎 속에 머리를 파묻었던 녀석이 나오면 주변을 빙빙 돌며 날개를 떨던 놈이 차례를 지켜 들어간다. 내 눈에만 그리 보이는지 알 수 없지만 새치기가 없다. 새삼 자연의 질서가 마음을 가렵게 한다.

마음이 오래 겨울잠을 자는 사이 어느새 왁자지껄 꽃이 피었다. 바람도 숨을 죽인다는 꽃잎 열리는 순간, 숨비 소리처럼 오래 참았다 터트리는 긴장을 느낄 틈도 없이 봄이 와 버렸다.

설렘도 없다. 저녁 설거지를 하다 문득 부엌 창 너머 목련을 보며 그저 덤덤히 ‘꽃 피었구나’ 건조한 독백. 연이어 날아든 부고들은 내 삶을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고양이 같은 봄날이 이어지는 사월. 그래도 문득 문득 나무들을 올려다 본다.

딸아이 성화에 못 이겨 나가 본 무심천에는 꽃잎이 날린다. 분분히 날리는 꽃잎들을 맞으며 걸어보는 길. 어느 새 꽃이 떠난 자리마다 초록 잎이 돋는다. 나무아래서는 마른 꽃잎을 품고 새 풀도 자란다. 떠나는 꽃잎들이 푸른 물을 흔들어 깨우고 간다.

이별이란 그런 것이리. ‘죽어 이별은 소리도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다’ 지만 그 슬픔은 남은 삶에 향기로 스민다. 단양, 장회나루 건너 두향의 무덤에도 풀빛 짙으려나 문득 매화를 사랑했던 이황의 시가 떠오른다.

 

黃卷中間對聖賢(황권중간대성현)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소식)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이황이 마흔여덟에 단양 군수로 부임했을 때 관기 두향은 열여덟 꽃다운 처녀였다. 출중한 외모와 거문고, 시와 서에 능하고 매화를 좋아했던 두향의 연정에 퇴계는 어찌하지 못하고 사랑에 빠졌지만 그 사랑은 너무 짧았다. 구 개월 뒤 풍기군수로 떠나는 퇴계의 짐 속엔 두향이 선물한 분매가 깊숙이 들어있었고,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이십여 년 다시는 두향을 만나지 않았던 퇴계는 매화를 노래한 시를 백수 넘게 남겼다. 차마 전하지 못한 그리움이 응축되어 아름다운 시가 되었으려니. 후대의 내게 그들의 이별은 선물이 되어 이 봄날 메마른 마음을 흔들어 깨운다.

때론 그렇게 이별은 아픈 선물이다. 물길을 따라 굽이굽이 단양 상가에 가던 그 봄날. 푸른 물빛에 부서지던 햇살을 보며 혼자 문득 두향을 떠올리며 처연하였는데 오늘은 지는 꽃잎 속을 걸으며 그녀의 사랑에 마음이 꼬물거리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숨어있는 그리움을 찾아 한 시 속을 헤매다보니 황량한 마음에도 푸른 물이 배어든다. 오래 참았던 숨을 내쉬어 본다.

물질을 끝내고 나온 해녀의 숨비소리 같은 가늘고 긴 휘파람 소리가 새어나온다.

사월도 어느새 중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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