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실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복실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 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4.04.14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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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강희진 <수필가>

강아지가 죽었다. 지난 토요일 새벽 강아지 줄에 끌려온 나무 막대기에 목이 찔려서였다. 그 날 새벽 마을에 사는 아저씨가 2시간여를 애타게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데 그게 바로 살려달라는 외침이었으련만 아무도 와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답답했다. 평소와는 달리 그렇게 울면 좀 와서 들여다보지 그랬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사람이 울어도 나와 보지 않는 세상에 강아지가 무슨 대수랴 하고 여긴 것 같았다. 그보다는 하필 새벽이라서 일이 더 공교로웠다.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낑낑대는 소리를 들은 지 2시간 후에 조용해지더라고 했으니 그게 불쌍한 강아지의 마지막이었다.

강아지가 온 것은 한 달 전이다. 어느 날 출근을 해 보니 공장 뒤뜰에 어린 강아지가 매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내게 꼬리를 흔들면서 낑낑거렸다. 그날은 그냥 지나쳤는데 다음날도 여전히 낑낑대기에 연유를 물어봤더니 직원이 처갓집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보니 아직 어린 강아지다. 맑은 눈이 ‘당신도 엄마잖아’ 라고 하는 것 같아 쓰다듬어 주며 이름을 ‘복실이’라고 지어주었다.

강아지를 좋아하지만 이따금 출근하는 나로서는 그게 전부였고 잘 먹이지도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곱게 죽었어도 어린 녀석이라 마음이 아팠을 텐데 변을 당해 피 토하는 울음을 2시간이나 보이다 죽었다는 것이 내내 가슴 아프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계모가 의붓딸을 학대 살해하고 은폐하려다 들통 난 칠곡 계모 사건이 떠올랐다. 계모는 심지어 죽은 아이의 친언니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까지 했다는데 뒤늦게야 알려졌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죽은 아이의 몸에서 상처를 발견한 담임교사가 ‘학대 소견’까지 써서 신고했지만 그대로 묵살되었다고 한다. 보다 못한 언니가 지구대에 신고했는데도 그냥 넘어갔으며 해바라기센터에서 경고했음에도 흐지부지 된 것은 다름 아닌 무관심의 소치다. 주위사람 누구라도 계모한테서 떼어 놓는 등의 관심을 가졌다면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와 직접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가볍게 넘어가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우리의 무관심이 멀쩡한 생명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허투루 넘길 게 아니다.

복실이 또한 동네 사람 누구라도 그 처절한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와 줬더라면 오늘도 반갑게 맞아 주지 않았을까? 나만 보면 또랑한 눈망울로 꼬리를 흔들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그보다는 한창 귀염을 받고 자랄 어린 소녀가 변을 당해 세상을 떠난 게 어린 강아지와 오버랩 되는 것 같다. 아직 어려서 누군가 관심을 갖고 돌봐줘야 할 이들에게 내려진 무관심의 소치는 너무나 가혹했다. 좀 더 관심을 갖고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말 못하는 동물이 비명 끝에 죽고 어린 소녀가 떨어지는 꽃처럼 피지도 못한 채 세상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아지가 죽던 날은 앞산의 벚꽃이 종일 휘날렸다. 갑자기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천천히 오래 피어야 할 꽃망울이 미처 도드라질 새도 없이 피고는 사흘 만에 떨어져 버렸다. 이상 기온의 여파로 요절해 버린 벚꽃과 강아지 때문에 봄날 아침이 자꾸 쓸쓸해진다. 일찍 찾아온 봄으로 천지에 꽃들이 의기양양 뽐내고 있지만 저 봄꽃이나마 비명에 간 소녀와 어린 강아지처럼 덧없이 지지 말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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