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의 위로
한 뼘의 위로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4.03.03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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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미세먼지 걷힌 삼월 하늘은 시리도록 깊고 푸르다. 찬바람 들까 보온테이프로 단단하게 막음 해놓았던 창을 시원하게 열어본다. 오랜만이다. 삼월의 바람은 훈풍인 듯 상쾌하면서도 겨울 뒷심이 심줄처럼 배 있어 옷섶으로 아프게 파고든다. 그래도 참 좋다. 그 바람이 스며든 자리마다 소란스럽게 봄이 움튼다. 아파트 베란다에도 동백 아래 더부살이하는 논냉이 꽃이 환하다. 데일 듯 뜨겁게 만개한 게발선인장 붉은 꽃은 겨우내 나눈 한 뼘의 힘이다.

지난 늦가을. 화분을 갈무리하며 거실 안에 들여놓을 것과 베란다에 그냥 둘 화초들을 선별하다 문득 미안했다. 마음 잣대에 따라 나도 모르게 어느 것이 더 귀한지 줄을 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둔다는 것은 남천처럼 겨울을 잘 견디는 내공 있는 화초란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론 얼어서 어찌되어도 아깝지 않다는 마음이 숨어 있었던 것. 길게는 이십년 짧게는 사오년 인연을 맺어오며 받은 소소한 즐거움을 떠올리니 참으로 잔인한 처사였다. 결국 모든 화초들을 있는 자리에 두고 아무리 추워도 잠들 무렵부터 잠이 깨는 아침까지 거실 문을 한 뼘 열어두고 살기로 했다.

한 뼘 덕분에 이른 아침이면 싸늘한 기운에 겉옷을 걸쳐야했지만 가족들의 배려를 느끼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문 열어두는 걸 잊고 잠이 든 날 화들짝 놀라 한밤중 깨어 나가보면 문이 살짝 열려있다. 식구 중 누군가가 마음 쓴 흔적이다. 문을 열어두는 폭도 각각. 두 뼘 가까이 열려 있는 날도 있고 한 뼘 살짝 모자랄 듯한 날도 있다. 그래도 누군가 잠들기 전 배려해준 한 뼘의 손길 덕에 베란다 화초들은 푸르고 싱싱하게 겨울을 견디고 누군가는 마음 따스했으려니….

요즘 생활고로 세상을 버리는 이들의 아픈 이야기들이 연거푸 올라와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만으로 빈곤이 해결되지 않는 사회 근본적 문제도 있지만 이웃에게 한 뼘의 배려가 있었다면 마지막 순간만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각자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문을 닫고 사는 시대가 되어버린 지금. 서로를 향한 문을 한 뼘 열어두고 살피면서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행을 가고 맛있는 요리를 먹고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들이 일상처럼 카스에도 넘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누군가는 그런 삶을 건너다보며 소외감을 느끼고 좌절한다. 원치 않았어도 내가 즐기는 시간이 누군가에겐 한 뼘의 문마저 닫아걸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겨우내 부쩍 엉덩이가 무거워졌다. 식사약속도 차 마시자는 약속도 거절한 채 웅크리고 책 속에 빠져있었다. 누군가 동안거에 들었냐고 농담을 해왔다. 어쩌면 지나가는 말로 차 한잔 하자던 친구에게 내가 들어줘야할 이야기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반갑다. 누군가 내게 한 뼘 열어주길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 혼자보기 아깝다. 차 한잔 하러오라고 문을 활짝 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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