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완전 하다면(1) - 의암 손병희
삶이 완전 하다면(1) - 의암 손병희
  •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4.03.02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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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3·1운동 하면 누가 가장 먼저 생각나지요? 하고 관람객들에게 물었다. 10명 중 8명은 "유관순 누나요" 라고 대답한다.

의암 손병희 유허지에 근무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 교과서의 힘이 참으로 크구나 싶다. 독립선언을 한 민족대표 33인 중 선두 주자 역할을 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중심에 서 있던 손병희 선생님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안타깝다. 손병희 선생님은 독립운동가요, 동학의 3대 교주이자, 교육사업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손병희 선생님은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청주목 관아의 서리였던 손의조(두홍)의 서자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날 당시 조선시대 사회는 신분간의 엄격한 차별과 적서의 멸시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 시대 서얼로 태어난다는 것은 한사람의 인간에게는 태생적 원죄와도 같았다고 하니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지 않는가. 그래서 선생은 신분과 서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 때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과 같이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남달리 강했던 분이기도 하다.

22살 때 큰조카 손천민이 동학을 믿으면 삼재팔난을 면할 수 있다고 동학에 입교할 것을 권유한다. 그렇지만 서자로 태어난 서러움과 그 당시 조선시대 사회의 불만에 싸여 오히려 삼재팔난이 다가와 이 세상이 모두 망했으면 좋겠다고 거절한다. 훗날 친구 서우순이 다시 선생을 찾아가 동학의 교리를 이야기해준다. ‘사람은 누구나 다 평등하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에 동화되어 동학에 입교한다. 동학에 입교한 후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종교에만 심취하게 된다.

그 후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수제자가 될 만큼 신임을 얻는다. 1894년 신분제도의 부당함과 적서차별이라는 사회제도의 불만으로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어지럽고 사회모순이 가득한 시대 상황에서 동학은 서민들에게 한줄기 빛이나 다름없었다. 동학이 일어나자 남접의 통영으로 전봉준이, 북접에서는 손병희 선생이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동학군 10만 명을 이끌고 관군과 싸워 이기게 된다.

그렇지만 2차 봉기에서 남, 북접 연합군은 결합해 서울로 가는 북상길에서 청나라와 일본군의 개입으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혁명의 의지가 좌절되고 만다.

그리고 강원도 원주에서 최시형이 붙잡혀 처형되면서 최시형의 뒤를 이어 37세에 동학의 3대 교주가 된다. 3대 교주가 되어 교세를 확장하고 종교운동에 전념해 있을 때 조카 손천민이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포교가 어려워지자 해외 망명을 결심한다. 1901년 중국 상해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이상헌이라는 이름으로 애국활동을 하며 개화세력인 권동진, 오세창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손병희 선생은 일본에서 애국회인 ‘진보회’를 조직하고 애국활동을 펼친다. 그때 같이 활동하던 이용구가 손병희 선생을 배신하고 친일 단체인 ‘일진회’와 통합하자 선생은 매국행위를 개탄하고 이용구와 송병준 등 친일분자를 출교시키고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고 1906년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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