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척화비
청주 척화비
  • 김명철 <충북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사>
  • 승인 2014.02.2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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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명철 <충북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사>

청주시내 한가운데 중앙공원이 있다. 이곳에서 북쪽 출입구 쪽으로 시커멓게 먹칠이 된 비석 하나가 마치 보초를 서듯이 외롭게 서 있다. 2단으로 된 기초석 위에 비석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간 채 처량하게 서있다. 공원을 산책하는 시민들 중에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쓸쓸한 마음마저 든다. 다소 거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비석의 크기는 높이 95㎝, 폭 46㎝, 두께 19㎝이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양과의 화친을 배척한다’는 뜻을 가진 척화비는 서양과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추진하던 흥선대원군이 세운 비석이다. 병인양요(프랑스)와 신미양요(미국)의 외침을 연거푸 격퇴한 뒤 승리(?)를 기념하고 일반 백성들에게 서양 배척의 의지를 보다 확고히 하는 의미에서 1871년 4월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3000여 중요 지점에 세워 외세의 침략에 경각심을 일으키려 했다.

그 내용은 척사 사상의 구호였던‘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이다.

이를 번역하면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들 자손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이다.

그러나 척화비는 임오군란(1882년)에 청나라 군대가 개입해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고 고종이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다. 청주 척화비도 이 때 철거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첫 번째 행의 ‘양이침범비전’ 중 윗 부분인 ‘양(洋)’과 ‘夷(이)’자와 두 번째 행의 ‘즉주화매국’중 윗 부분인 ‘則(즉)’자와 ‘主(주)’자가 떨어졌고,‘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의 윗 부분인 ‘戒(계)’자와 ‘我(아)’자가 떨어져 이상한 비석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런데 철거 당시 어떻게 된 사연인지 이 비석은 오랫동안 청주시 석교동의 하수구 뚜껑돌로 전락해서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밟히는 신세가 됐다가 1976년에 정찬일씨라는 분이 발견해 현재 위치로 옮겨 놓았다고 전해진다.

척화비로 상징되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세계사적인 흐름에 역행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 침략 앞에 민족을 지키려는 갸륵한 마음을 숭상하지는 못할망정 조상들의 노력과 삶의 흔적을 이렇게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다. 후손으로서 반성해야 한다. 비문의 내용 중‘자손 만대에 경계한다.’는 내용이 더욱 가슴을 친다.

최근 일본 정부의 우경화 추세가 도를 넘더니, 급기야 독도가 자국 고유 영토라는 주장을 중고등학교 교과서 제작 지침에 반영하겠다는 방침을 공식 확인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엄연히 주인 있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놈들을 우리는 ‘강도’라고 한다. 강도에게 억울하게 강탈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온 국민의 마음 속에 척화비라도 하나 새롭게 만들어 세워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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