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날에
입춘 날에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2.10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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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맨 앞에 있으면서, 봄뿐만 아니라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節氣)가 바로 입춘(立春)이다. 보통 양력 이월 사일과 겹치는 이 날, 사람들은 대문이나 기둥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같은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이거나, 대문에 용(龍) 자와 호(虎) 자를 써 붙여 한 해의 복과 안녕을 빌곤 하였다. 묵은해가 새해로 바뀌고, 겨울이 봄으로 바뀌는 날로 인식되기 때문에, 아직 여전히 춥고 삭막한 겨울임에도, 입춘(立春)이 되면 사람들은 봄을 떠올리고, 봄의 모습을 성급하게 그리곤 하였으니, 송(宋)의 시인 장식(張)도 그러하였다.



◈ 입춘에 우연히 짓다(立春偶成 )

律回歲만빙霜少(율회세만빙상소) : 계절은 돌고 해는 늦어 얼음과 서리 줄어들고

春到人間草木知(춘도인간초목지) : 봄이 인간 세상에 온 것을 풀과 나무가 아네

便覺眼前生意滿(편각안전생의만) : 문득 눈앞에 살아 있는 기운 가득함 깨달으니

東風吹水綠參差(동풍취수록참치) : 동풍이 물에 불어 파랗게 초목이 불쑥 자라났구나

 

※ 계절이 순환하는 질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그래서 율법(律法)인 것이다. 이 율법대로 어김없이 계절은 돌아오고, 묵은해는 저물어 사라진다. 입춘(立春)은 달력으로만 확인되는 게 아니라, 육안(肉眼)으로도 충분히 감지되었다. 언제까지나 기세등등하며 좀처럼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던 얼음과 서리도, 소리 없이 다가온 계절의 변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지, 보이는 것이 부쩍 줄어들었다.

인간 세상은 늘 일정한 계절을 유지하는 신선(神仙) 경계(境界)와는 달리, 사시사철 계절의 변화를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四季)가 번갈아 오는 것이다. 겨우내 추위에 시달리던 인간 세상에 봄이 오는 것은 반갑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봄이 온 것을 온몸으로 알아채는 것은 다름 아닌 초목(草木)들이다.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풀과 나무들은 봄을 감지하기 무섭게 파랗게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이 초목들의 파란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봄을 느끼는 것이다.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파랗게 봄을 품은 초목들을 보고 간접적으로나마 봄이 왔음을 알게 되자마자, 시인의 눈앞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생기(生氣)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을 수 없던 시인의 주변이 알고 보니, 온통 생기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다 봄을 가장 빨리 알아 챈 초목 덕이었다. 그러고 보니, 바람도 여느 때와는 달리 동쪽으로부터 불고 있었다. 이 동쪽 바람을 맞고 있는 물에는 이미 겨울의 얼음이 온 데 간 데가 없었다. 그리고 물가에는 파란 풀이 훌쩍 자라 있었다. 시인은 달력을 보고 입춘을 알아 챈 게 아니라, 파랗게 변한 초목들을 보고 입춘을 알았던 것이다.

봄은 달력에서 오는 게 아니다. 초목과 같은 주변의 생명체가 봄이 왔음을 먼저 알고, 푸른 빛을 발해 신호를 보내면 사람들은 그제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봄의 시작인 입춘이 되면 어김없이 파란 빛을 띠는 초목들이야말로 봄의 전령사(傳令使)인 셈이다. 이 전령사가 전한 조물주의 영(令)에 따라 인간 세상은 발 빠르게 겨울 모드에서 봄 모드로 바뀌게 된다. 동풍이 불어서 언 땅을 녹이고, 동면하던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니는 것이 모두 입춘(立春) 효과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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