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만지는 옛 것(2)-(영조대왕 태실)
눈으로 만지는 옛 것(2)-(영조대왕 태실)
  •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4.02.09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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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태함은 전국의 명당을 찾아 태실을 만들고 태봉의식을 거행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영조의 등극을 반대하고 노론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반란이 일어난 곳에 영조의 태가 묻혀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본래 왕의 즉위 직후 석조물을 고쳐 다시 조성하여야 하지만 영조의 태실은 마침 청주지방에서 일어난 이인좌의 난과 거듭된 가뭄으로 바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영조가 즉위하고 난 후 5년(1729년)에야 예조판서의 건의로 다시 치장하였다고 한다.

태실은 조선조 말기까지 나라에서 8명의 수호군을 두어 관리했지만 태실의 훼손도 일제 강점기의 수난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조선총독부가 1928년 전국에 있는 태실을 관리하기 어렵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엉큼한 저의가 있었다. 민족말살 정치의 일환으로 조선 왕실의 존엄성을 실추시키고 조선왕조의 기를 끊기 위함이었다. 그때 태항아리만 꺼내 서울 창경궁으로 옮기면서 크게 파손되자 뒷날 태실 자리에 민묘가 들어섰고 태실비는 주민들이 마을로 옮겨 세웠는데 1982년 청원군에서 갓 처마돌이 없는 상태로 태실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문화재단지 내에 태함이 있다. 초등학생들이 체험학습을 오면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손으로 만지고 껴안고 뚜껑을 열어보려고 한다. 그러면 손으로 만지지 말고 눈으로만 만져보라고 한다. 아이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눈으로 차근차근 곡선을 따라 주~욱 더듬어 보라고 한다. 태함은 왕손이 잘되게 하고 병을 앓지 않고 오래 살라는 뜻에서 만들어졌다고 설명을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부모님은 여러분이 태어났을 때 어떻게 자라주기를 바랄까요? 하고 물었다.

“잘이요.”

과연 초등학생다운 대답이다. 내 웃음소리가 높아지면서 맞아요, 부모님께서 여러분이 잘 자라주기를 바라듯이 왕가에서도 같은 바람으로 이렇게 태함을 만들게 된 거라는 설명을 한다. 유물전시관을 나서는데 한 아이가 내 손을 슬며시 잡으며 뭔가 손에 쥐어준다. 사탕 두 개다. 한쪽 눈을 찡긋하는 윙크로 나도 내 마음을 전한다. 한겨울 추위에도 내 가슴은 늘 따스하다. 이런 고사리 손으로 감사의 말 대신 건네주는 따스한 마음들이 있어서다.

우리는 살면서 참으로 많은 인연의 고리를 만들며 살고 있다. 누구의 친구, 혹은 누구의 친척이나 지인이라는 학연, 혹은 지연·혈연의 연결고리가 쉽게 만들어 진다. 우리나라만큼 혈연, 지연, 학연을 따지는 나라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태를 묻는 독특한 풍습은 같은 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만의 고유한 문화라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탯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어떤 인연의 고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들과 딸을 낳았을 때 입혔던 배냇저고리를 나는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도 간직해 두었다. 가끔씩 꺼내보면서 그때의 감동을 오래오래 즐기고 싶어서다. 누렇게 빛바랜 저고리를 꺼내 다시 삶아 햇살 고운 날 까슬까슬하게 말려 두었다. 4월이면 딸이 아기를 낳는다. 내가 받은 그때의 감동을 딸아이도 머잖아 느낄 수 있으리라.(출처: 이규상의 「한국의 태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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