것대산 봉수대를 아시나요?
것대산 봉수대를 아시나요?
  • 김명철 <충북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사>
  • 승인 2014.02.04 19: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

김명철 <충북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사>

청주 상당산성 제1터널 입구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상봉재 길을 따라 청주시내를 바라보며 산을 오르면 어느 듯 상봉재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상당산성이 나오고, 오른쪽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면 청주시 근교의 유일한 봉수대로 청주시민들이 즐겨 찾는 것대산 봉수대를 만나게 된다. 요즘에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는 국가 긴급 통신 시설이다. 것대산 봉수대는 전국의 5개 봉수 노선 가운데 경남 남해의 금산 봉수에서 출발하여 서울 목멱산(남산)까지 가는 두 번째 노선이며, 고려시대부터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쪽으로는 문의 소이산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으로 진천 소을산 봉수에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거차대 봉수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이후의 지리서에는 거질대산봉수라고 적혀있다. 이곳에는 별장 1인, 감관 5인, 봉군 25명, 봉군보 75명이 소속되어 교대로 봉역을 담당하였다. 평상시에는 1홰, 적군이 나타나면 2홰, 적군이 국경에 접근하면 3홰, 국경을 침범하면 4홰, 전투가 벌어지면 5홰를 올렸다고 한다.

봉수대가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봉수제도가 마련된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조선 고종 31년(1895) 봉수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그 기능을 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까지 것대산 봉수대는 동서로 긴 타원모양으로, 둘레에 보호벽을 둘렀던 흔적이 남아 있으나, 무덤 1기가 봉수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성의 주변을 살펴 사태를 알리는 통신시설인 봉돈의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는데, 2009년에 봉수대를 복원하여 시민들이 많이 찾는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 것대산 봉수대에는 가슴 아픈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영조 때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인좌의 난이 일어날 때의 일이다. 이 무렵 것대산 봉수대에는 선이라는 예쁜 외동딸을 둔 봉수지기 목 씨 노인이었다. 예쁘고 지혜롭게 자란 선이는 봉수대 아랫마을 청년인 백룡 총각과 정혼까지 하였다. 그러나 홀로 남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혼인 날짜를 미루고 지냈다. 백룡 총각은 하루라도 빨리 혼인하고 싶은 마음에 매일 같이 봉화대에 올라와서 장인인 목 씨 노인의 일을 거들어주고 있던 터였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반군은 봉화가 피어올라 서울로 보고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장 먼저 병사들을 것대산 봉수대로 보내 봉수지기 목 노인을 죽였다. 이날은 청주에서 5일장이 서는 날이었는데, 선이는 청주 장에 나간 백룡 총각을 기다리기 위해 고개마루에 나가 있다가 병사들이 아버지를 해치는 것을 목격하였다. 놀란 선이는 곧바로 봉수대로 달려가 봉홧불을 지펴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러자 반군의 병사들은 봉수대로 올라가 선이 마저 죽이고, 봉홧불을 꺼버렸다. 이때 장에서 돌아오다 봉수대에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급하게 달려온 백룡 총각은 선이의 죽음을 목격하고, 병사들에게 달려가 격투 끝에 반군들을 격퇴하고 봉홧불을 지펴 연기를 피워 올려 청주에 반란군이 일어난 것을 알릴 수 있었다. 결국, 서울로 반란이 일어난 사실이 보고되었고, 이인좌의 난이 진압될 수 있었다.

이번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것대산 봉수대에 가야겠다. 하얀 눈을 밟으며 이곳에 오르면 죽음으로 고향과 나라의 어려움을 알린 선이 처녀와 백룡 총각의 마음이 저절로 느껴질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