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家長)의 소회(所懷)
가장(家長)의 소회(所懷)
  • 심억수 <시인>
  • 승인 2014.02.0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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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심억수 <시인>

설 연휴를 보내면서 많은 생각에 머릿속이 실타래 엉키듯 복잡하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가장이라는 이유로 아랫목을 지키는 처지가 되었다.

아버님께서 생전에 계실 때는 몰랐던 중압감이 밀려왔다. 종갓집 장손으로 집안의 어른 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부담으로 몰려 올 줄 몰랐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서 일을 처리하던 방향이나 원칙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3년 동안 계승하는 일이 효자의 도리라 하였다. (子曰 三年 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부친께서 생존에 계실 때도 그 뜻을 받들지 못한 불효자이기에 선친의 도를 지켜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버님께서는 나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라 하셨지만 생각해 보니 남을 먼저 배려하며 살아온 날이 없다. 내가 우선이요, 내 욕심만 내세웠다.

오로지 자식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어머니는 이제는 장성한 아들 그늘에서 편히 사실 연세인데도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따로 사시면서 늘 나는 괜찮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지척에 홀로 계시는 어머님께 안부 전화도 자주 드리지 못하는 불효를 하고 있다.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을 어머님께 표현하지도 못하고 있다.

설 연휴로 시끌벅적 북적이던 친지들도 각자 자기의 가정으로 떠난 오후, 가장의 중압감에서 벗어나려고 무심천 강변을 따라 걸었다. 강물이 흘러가는 속도 보다 더 바쁘게 살아온 날들이 물결에 저만큼 떠밀려 간다.

어디 나만이 그러할까 위안도 삼아본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의 꿈과 희망을 안고 흘러가는 무심천을 따라 걸으며 나를 돌아본다.

세상을 살면서 저마다 삶의 여건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에 각자의 삶을 영위 하면서 운명적으로 살아간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아실현을 위한 소망과 꿈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과연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자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나의 삶이 자녀들에게 본보기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나처럼 살아야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자신이 없다. 나의 삶은 기교가 들어간 노래처럼 순간의 아름다움과 멋스러움만 추구하였지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 울림의 삶을 살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의 이런 삶도 아주 척박하거나 비루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돈을 벌기 위해 모두를 버릴 때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산과 들로 나돌아다녔으니 그들보다 나쁜 삶은 아니었으리라. 남들이 통장의 잔액을 확인하며 흐뭇해할 때 나는 틈틈이 써놓은 글을 읽는다. 나의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었던 시간을 추억하는 문학통장이 있기에 마음 뿌듯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위안을 스스로 해보기도 한다.

시간은 잠시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날마다 좋은 날을 만들어도 남은 시간은 살아온 날의 반만큼도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로 삶의 가치를 다르게 생각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좀 더 자유로워지고 좀 더 넉넉해지고 좀 더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청명하다. 마음도 맑아지는 기분이다.

무심천 둔치의 갈대가 바람에 서로 몸을 부딪치면서도 원망하지 않고 다가올 찬란한 봄을 만들고 있다. 자연은 저토록 자신의 삶에 충실하여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가꾸고 있다.

나는 남은 인생을 어떤 모습으로 창조하고 있는 걸까? 봄의 왈츠로 다가오는 갈대의 춤사위를 보며 가장의 책임에서 오는 정신적 굴레를 잠시 벗어 던져본다.

바람이 순해졌다. 봄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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