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관한 단상
비에 관한 단상
  • 김희숙 <비봉유치원 교사·수필가>
  • 승인 2014.02.03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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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희숙 <비봉유치원 교사·수필가>

아침을 알리는 알람 소리와 함께 눈을 뜨니 밖은 우중충한 회색이었다. 소리없이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들기 전 머리맡에 준비해 둔 물을, 일어나자마자 들이키는건 오랜 습관이다. 물을 마시고 다시 누웠다. 누운 채 스트레칭을 하며, 온몸으로 다가올 하루를 타진해 보았다.

오늘 하루도 안녕! 잠시 멍하니 천정을 응시하다 잠을 털고 방에서 나왔다. 현관문을 열었다. 세상소식을 한 손에 대수롭지 않게 집어 들고 다시 침대로 향했다. 세상을 쫘악 펼치고 일면부터 대충대충 읽어나갔다.

오늘 세상에선 선거와 출판기념회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나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잘도 돌아가는 세상을 접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요크셔테리아 두 마리가 졸졸 거린다. 어쩌면 그들에겐 내가 세상이 아닐까하는 오만한 생각을 해보았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내 멋대로 강아지 밥을 줬다. 나도 허기를 밀어내려 입안으로 아침을 털어 넣고 또다시 침대로 향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각의 공간. 휴일이면 난 이 사각의 침대에서 여간해서 내려오지 않는다. 아침부터 비가 오는 탓에 공지영의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라는 산문집을 들었다. 앉아서 읽다가 누워서 읽다가 엎드려 읽다가 내맘대로 뒹굴뒹굴 너무나 행복한 아침이었다.

한참 활자에 눈을 들이대고 있는데, 카톡이 울렸다. 이틀 전 스마트폰을 사서 처음 카톡을 깔았다. 아들 녀석에게 물어 물어 카톡을 깔고 사진을 몇장 올렸다. 고요히 책을 읽고 있는데 톡하고 신호음이 울렸다.

전화기를 들여다보니 “미인이시네요.”라는 글자가 톡톡거렸다. 신기했다. “사진발이에요! 그런데 아무에게나 제 사진이 보이나요? 그쪽은 제가 모르는 사람인거 같은데요?” “아마도 제가 아는 친구가 전에 썼던 전화번호를 쓰고 계신것 같은데요. 그래서 제 핸드폰에 전화번호가 있었나 봅니다. 그러면 자동으로 보입니다. 남자친구 있나요? 무슨 일을 하시나요?” 스물여덟살의 부산 사람이란다.

예전에 보았던 접속이라는 영화가 머리를 스쳤다. 영화에서만 본 일들이 내게도 일어났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이 나이에 인생의 영화를 다시 찍는 다는 일이 얼마나 번거롭고 우스꽝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얼른 사진들을 지워버렸다. 영화를 찍는 대신 영화를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빨래와 청소, 설거지를 서둘렀건만 상영시간에 간들간들하게 영화관에 입장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영화 중간에 나오는 ‘조용히 비가 내리네~ 추억을 말해주듯이~’ 비오는 날의 영상을 가득 담은 노래는 옛 생각에 잠기게 했다.

돌아오는 길 명암저수지에 차를 댔다. 촉촉한 겨울비가 저수지와 소근대며 묘하게 나를 끌었다. 시동을 끄고 핸드폰을 뒤져 빗물이라는 노래를 차안 가득 넘치도록 틀었다. 오늘은 겨울비가 나를 하루 종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눈을 감고 나즈막히 노래를 읊조려 보았다. 어떤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자네는 가만 보면 너무 산만해~ 이일 저일 왜 그리 바뻐? 사람이 사유할 시간적 여유를 갖고 살아야지!” “교수님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요.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에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하고 싶은 일은 못하면 죽을 것 같고. 전 인생 자체가 입체적이에요. 나도 평면적이고 단조로운 삶을 고요하게 살고픈데 그게 잘 안되네요.”

명암저수지에 내려앉는 겨울비를 보며 생각에 잠겨본다. 비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야릇한 매력을 갖고 있다. 급하게 살아온 시간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라고 서두르지 말라고 토닥여 주는 것 같았다. 올 한해는 조근조근 살아보련다. 산만한 내 인생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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