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과 거울
설과 거울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2.03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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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세월의 흐름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으니, 하나는 쉼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다는 것이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세월은 그저 흐를 뿐,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日月逝矣 歲不我延)”라고 탄식한 것은 이러한 세월의 속성을 잘 함축하고 있다.

잠시의 멈춤도 없이, 어떠한 가림도 없이 흐르는 세월이지만, 그 모습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던히도 세월이 흐르는 모습을 그려내려 했지만, 비유적 방법 외에는 달리 수가 없었다. 흐르는 물 정도가 가장 근사한 모습을 띠는 것으로 사람들은 간주해왔다. 이처럼 세월 자체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세월이 흐른 흔적은 사물마다 각자 다른 양상으로 남게 마련이다. 일상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세월의 흔적들이 유달리 뚜렷하게 보이는 날이 있으니, 바로 정월 초하루가 그 날이다. 조선(朝鮮)의 문인 박지원(朴趾源) 또한 정월 초하루 아침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발견하고 말았다.



◈ 설날 아침 거울을 보고(元朝對鏡)

忽然添得數莖鬚(홀연첨득수경수) : 갑자기 생겨났구나, 몇 가닥 수염

全不加長六尺軀(전불가장육척구) : 육척의 키는 전혀 자라지 않았건만

鏡裏容顔隨歲異(경이용안수세이) : 거울 속 얼굴은 세월 따라 달라지고

穉心猶自去年吾(치심유자거년오) : 어린 내 마음은 지난해 나로구나

 

※ 거울이 흔치 않던 시절에 거울을 본 것 자체가 이 날이 예삿날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해가 바뀌어 또다시 정월 초하루가 된 것이다. 오랜만에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본 시인을 화들짝 놀라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지금까지 못 보던 수염 몇 가닥이었다. 설이라는 특수한 날을 맞은 것만으로도 세월의 흐름을 평소보다는 몇 곱절 더 절실히 느꼈을 터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덤덤하던 시인은 거울 속에 비친 못 보던 수염 몇 가닥에서 세월의 흔적을 눈으로 직접 목도(目睹)하고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시인의 키는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전혀 더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 생겨난 수염 몇 가닥이 확 눈에 띌 수밖에 없었으리라. 수염에 눈이 간 김에 시인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그 결과 그 모습이 세월을 따라 달라져 있음을 발견했다.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얼굴 모습이 바뀌었음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있었으니, 시인의 마음이 그것이다. 시인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린 마음은 지난해나 똑같다고 생각했다. 시인은 얼굴에 새로 생겨난 수염 몇 가닥과 달라진 얼굴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발견했다. 육 척이나 되는 키나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런 데서는 세월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세월은 한순간의 멈춤도 없이 흘러가지만, 평소에 사람들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한 해가 바뀌는 설 같은 특별한 날에 세월의 흐름을 유난히 느끼게 된다. 그러면 평소에 보지 않던 거울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 속에 비친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있음을 보고는 새삼 놀라곤 한다. 이 세상에 세월의 흐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세월의 흔적이 반가울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이유도 없다. 세월의 흐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모습을 발견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삶의 지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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