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만지는 옛 것(1)-(영조대왕 태실)
눈으로 만지는 옛 것(1)-(영조대왕 태실)
  •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4.02.02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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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그 어떤 감동보다도 눈물이 날 만큼 가슴 떨렸던 순간은 아마도 내가 첫 아이를 낳았던 그 때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도 내 아이가 태어날 때를 생각하면 말로는 형언하지 못할 그런 행복과 환희의 순간이었다.

하물며 왕가에서 왕손이 태어나면 나라의 경사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아이를 출산하면 태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처리에 예(禮)를 다했던 우리 선조들의 문화가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에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그것이 바로 영조의 태실이다. 영조대왕 태실 가봉의는 조선 영조의 태실을 가봉하는데 따른 경위와 또는 의식 절차 등 모든 관련 사실을 적은 필사본이다. 책자에 의하면 영조의 태는 숙종 20년 (1694년) 9월 26일에 관상감에서 올린 글에 따라 1등 태봉인 무성리 태봉산으로 선정되어, 다음해 9월 28일 진시에 태를 안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의궤에는 이 밖에도 일자별로 자세한 조성 경위와 관계한 사람은 물론 지방별로 동원된 역군, 장인, 승군의 인원수와 수요물자의 내역 또는 태실의 각종 석조물과 태실비의 형태 및 크기 등 세부 내용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현재 영조대왕 태실 가봉의는 청원군 문의 문화재단지 내의 유물전시관에 전시가 되어있어 누구라도 볼 수 있다.

태함이란 왕가에 출산이 있을 때 그 출생아의 태를 담는 상자를 말한다. 태실은 태함을 안에 넣고 왕자 및 공주, 옹주의 경우는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고 왕의 경우는 석재를 쌓아서 만든 무덤의 매장시설이다. 또 태함은 내항아리와 외항아리로 구분을 짓는다. 내항아리에 태를 담고 내항아리의 외부를 솜으로 감싼 다음 다시 외항아리에 넣어 태함을 만들게 된다.

태를 보관하는 방법은 건태라고 해서 태를 건조시켜서 습기가 없는 상태로 보관하는 방법이다. 소태는 태를 태워서 보관하는 것을 말한다. 이 밖에도 매태라고 해서 길한 날을 택해서 땅에 묻는 방법이 있다. 심지어 왕비가 아이를 낳으면 그것을 7일간 항아리에 보관했다가 꺼내 맑은 물에 백번을 씻은 후에 다시 항아리에 넣는 등 왕가에서 주로 많이 하는 방법 들이다. 또한 민가에서도 길한 곳에 탯줄을 묻거나 태우기도 했다. 탯줄을 잘 수습해야만 그 음덕이 자손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무병장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선 왕실에서는 왜 태실을 만들었을까. 여기에는 인간 생명의 존중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태를 모아 태실을 만드는 일은 왕실의 일이기도 했지만 국가적인 사업이기도 했다. 이 일을 관할하던 관청이 관상감이었고 이를 관장하는 관리는 안태사라고 했다. 관청과 관리를 둬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무병장수와 왕손의 번창을 위해 태를 석실에 안태하였다. 후에 왕위에 오르면 태실에 위용을 갖추기 위해, 일정한 의식과 절차에 따라 태실을 만들어 주위에 상석을 깔고 난간을 둘러 태실을 만들었다.

영조의 태실은 공주에 있는 숙종의 태실을 모방하여 영조 5년 (1729년)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크기가 다른 태함의 규모보다 좀 작은 편이다. 그 이유를 일설에서는 어머니가 궁중의 정실부인이 아니라 궁중에서 부리는 무수리라는 천한 신분이기 때문이 아니었겠느냐고 추측하고 있다.(출처 - 이규상의 「한국의 태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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