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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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4.01.28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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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친정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다. 작년부터 허리가 좋지 않아 걱정인데 명절을 코앞에 두고 더 나빠진 것은 아닌지 내 목소리의 톤이 높아진다. 어머니는 허리는 아프지만 견딜만 하다고 하신다. 그리고는 괜스레 다 아는 얘기를 반복하신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뜻이다. 자꾸 말을 돌리다 남동생내외가 딸 덕분에 웨딩촬영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며느리는 두 번씩이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니 좋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어머니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 나는 많이 부러우냐고 물었다.

춘삼월이면 친정조카딸이 결혼을 한다. 이어 신록이 짙어지는 오월에는 딸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다. 모두 연애결혼이다. 사윗감들의 조건도 나쁘지 않아 순탄하게 예식준비를 하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릿募� 조카딸의 혼사가 먼저다 보니 준비하는 일도 앞서간다. 웨딩촬영도 마쳤고 함도 미리 받았다. 어머니는 손녀들의 결혼이 행복하고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니 좋으면서도 부러우신가 보다.

유년시절, 우리 동네에 근동의 동네를 오가며 약을 팔던 약장수할머니가 있었다. 그 할머니가 중매쟁이 노릇을 잘 하였었다. 부모님도 그분이 하셨다고 했다. 어머니를 보고 양쪽 집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그즈음 할아버지께서는 병석에 누워계서 하루빨리 며느리를 보고싶어 하셨으나 혼사가 이뤄지기도 전에 돌아가셨단다. 결국 어머니는 혼사 말이 오고 갔었다는 이유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시집에서 보낸 가마를 타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레 낯선 곳으로 오게 되었단다. 열일곱의 나이에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한 번도 본적 없는 열아홉살의 신랑을 만난 것이다. 상중인지라 도착하자마자 이웃집 마당에서 평상복을 입은 채로 물 한 그릇 떠놓고 혼례를 치렀단다. 그리고 상복으로 갈아입고 며느리 노릇을 하며 부엌에서 버선이 새카맣도록 죽어라 일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 부모님을 모시고 나들이를 갔었다. 나는 아버지께 웃으며 장난을 걸었다. 얼굴도 모르는 색시를 처음 만났을 때 기분이 어떠셨느냐, 싫지는 않았느냐 짓궂게 했었다. 나와는 다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아버지는 대답하셨다. “인연이 되어 나에게 온 사람인데 못생겼으면 어떻고 잘생겼으면 어떠냐! 내가 받아들여 감싸고 살아야 사람의 도리지.” 그 때의 아버지 말씀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배우자에 대한 눈높이가 있는데 욕심을 버리고 순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인가. 내 삶이 힘들 때면 나는 가끔 어머니에게 묻는다. 어린나이에 그 일을 어떻게 감당했었느냐고 하면 죽고 싶었다고 하신다. 그래도 아버지가 말없이 감싸주어 견딜 수 있었다고 했다. 모든 조건은 열악했지만 남편의 사랑이 어머니의 두려운 마음에 그늘을 몰아내고 꽃을 피게 한 것이다.

60여년을 해로하면서 부모님의 금실은 한결같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가슴 속에 항상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혼례식에 대한 소망이 있다는 걸 나는 안다. 몇 년 전 회혼식(回婚式)을 준비하려고 어머니께 슬쩍 운을 떼어 보았었다. 60년 전 입지 못했던 혼례복을 입고 해로 60년을 기념해 드리고 싶어서다. 어머니는 다 늙어서 무슨 소용이냐고 거절하였었다. 허나 몸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심란하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손녀들의 결혼을 계기로 초라했던 당신의 혼례식 날이 생각났던 게다.

사랑인가. 조건인가. 결혼에 대한 오래된 질문이다. 물질만능시대인 요즘에는 사랑만으로 결혼하는 경우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될 터이고 조건만 보고 결혼한다면 사랑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키지 못할 터이다.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이 될 수 있을까. 두 가지 다 불완전하다. 나는 조건보다는 사랑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조건은 두 사람이 만들어 가면 된다는 것을 부모님이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사랑도, 조건도 따질 겨를 없이 결혼한 부모님은 두 가지를 다 충족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하며 사셨다. 그분들이 몇 년이나 새해를 맞으실 수 있을까. 늦기 전에 어머니에게 웨딩촬영을 감사의 설 선물로 드릴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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