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 이야기
동백 이야기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1.27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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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한 겨울의 산야(山野)에서 붉은 꽃을 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만약 이 세상에 동백(冬柏)이라는 나무가 없었다면, 한 겨울에 붉은 꽃을 보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 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백은 겨울의 홍일점(紅一點)으로 겨울의 삭막함을 녹여내는 희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상록의 잎새 사이로 선홍(鮮紅)의 꽃잎을 수줍은 듯 드러낸 동백의 자태는 한 겨울에 만나는 진경이라서 더욱 황홀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하얀 눈 속에 빨갛게 핀 동백을 만난다면 그 감회는 배가 될 것이다. 송(宋)의 시인 육유(陸游)는 이러한 설중(雪中)의 동백을 보고 감회에 젖었다.

 

◈ 동백(山茶)

雪裏開花到春晩(설리개화도춘만) : 눈 속에 꽃을 피워 늦은 봄까지 이르나니

歲閒耐久孰如君(세한내구숙여군) : 세월 한가할 때 오래 견딤에는 너만한 이 누군가

憑闌歎息無人會(빙란탄식무인회) : 난간에 기대어, 사람 없음 탄식하노니

三十年前宴海雲(삼십년전연해운) : 삼십 년 전 연회 때는 바다의 구름 같았었지

 

※ 동백은 차(茶)나무 과에 속하기 때문에 산다(山茶)로도 불린다. 한 겨울 눈 속에서 빨갛게 꽃을 피우는 것만으로도 겨울의 진객(珍客)으로 손색이 없지만, 이 꽃은 다른 많은 꽃들과는 달리 단명(短命)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보통 꽃들은 열흘 이상 곱게 피어 있기가 힘들다. 그런데 동백은 한겨울에 핀 꽃이 늦은 봄까지 지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출중한 면모를 과시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동백이 남달리 오랜 시간을 꽃 피우는 것은 남다른 인내심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꽃의 수명이 긴 것과는 다르다. 세속의 번잡한 일들로부터 벗어나 한가롭게 지내는 것도 오래 지속하기는 무척 힘들다. 이러한 한가한 세월을 오래도록 버텨내기로는 아무래도 동백만한 게 없다. 그러면 꽃에게 한가함이란 무엇인가? 여러 꽃들이 앞다투어 미색과 향기를 뽐내는 봄이나 가을을 피해, 대부분의 꽃들이 기피하는 겨울에 조용히 피어나 꽃 없는 시절을 밝혀주는 것이리라.

시인은 흰 눈 속의 동백에게서 세속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자신의 향기를 잃지 않는, 탈속의 기품을 발견한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동백의 풍모를 보고 감회에 젖어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기에 이른다. 지금 시인은 어느 큰 누각에 올라서 난간에 기댄 채 홀로 서 있다. 삼십 년 전, 이 누각에서 연회를 할 때는 사람들이 바다의 구름처럼 모였었는데, 지금은 누각에서 만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에 대해 시인은 탄식을 금치 못 한다. 그러나 시인의 이 탄식은 회고시(懷古詩)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영고성쇠(榮枯盛衰)에 대한 탄식과는 다르다. 시인은 누각의 난간에 홀로 기대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한 겨울에 홀로 피어 있는 동백에 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자신의 쓸쓸한 처지를 한탄한 것이 아니라, 동백꽃처럼 한가로이 속세에서 떨어져 자신의 모습을 꿋꿋하게 지키는 것을 대견스러워 한 것이다.

동백은 한 겨울 눈 속에서 빨갛게 피어 있을 때, 그 진면목이 잘 드러난다. 다른 꽃들이 다투어 피는 철인 봄이나 가을을 굳이 마다하고, 추운 겨울에 홀로 피는 동백은 세속적인 경쟁을 초월한, 꽃의 군자(君子)라고 불러도 좋다. 타물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결함을 지킬 줄 아는 동백의 기품은 겨울이 춥고 삭막할수록 더욱 그 진가가 드러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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