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질
교육의 질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4.01.22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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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대학이 몸을 줄이는 것 때문에 난리다. 자발적이지는 않다. 학령인구의 감소로 2023년에는 현재의 대학정원 56만 명 가운데 40만 명밖에 못 채운다. 대학이 마구 늘어난 것도 문제지만, 마음대로 대학을 세우라고 내버려둔 것(대학설립준칙주의: 준칙에만 맞으면 서울이 아니면 누구나 어디다 세워도 된다.)도 원인 가운데 하나다. 지금은 탓만 할 때가 아니다. 10년 후에 벌어질 일을 준비할 때다.

내버려두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그냥 내버려두기에는 부조리와 폐해가 너무 많다. 그 가운데 피해보는 것은 선량한 학생이다. 그래서 정부가 10년을 앞두고 대학 몸집 줄이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요즘 대학에 사업비(운영비가 아니다.)를 지급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평가기준이 바로 학생을 얼마나 줄였는가에 달려 있을 정도다. 국립대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업료에 높은 교육의 질을 보장하기 때문에 국민의 수요가 있다. 그런데도 정부가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곧 국가기관이기 때문에, 국립대도 인원감축에서 자유롭지 않다. 서울이건 지방이건 같은 비율로 줄이려고 한다. 서울사립대도 반발이지만 지방국립대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다.

줄이는 기준이 무엇인가? 교육부에서는 이제 양이 아닌 질의 평가를 들고 나왔다. 여태껏 평가되지 않은 것을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학업투자(수업준비시간, 과제 수, 보고서양), 학습의 능동성(질문, 팀 프로젝트), 지적 성취(분석력, 판단력 등), 교우(친밀감이나 상호학습), 교수역할(상담, 피드백), 학생지원(직원, 교내활동)이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질을 따진다니 한편으로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다. 진정한 대학평가는 위의 것이 좌우한다. 건물이 많다고 좋은 학교는 아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일단 허우대가 멀쩡한 것을 좋아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교수가 학생에 관심과 열정을 갖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에 따라 교수의 일은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당연할 일인데 그것을 수치화한다니 좀 당혹스럽다. 분석력, 판단력을 어떻게 측정하는가? 학생들에게 분석력이나 판단력이 늘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수밖에는 없을 텐데, 거기에는 학교와 학생의 공통적인 이익이 개입되면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나가기 쉽다. 어쩌면 사립대에서는 총력전을 벌여 학교의 위상(실은 점수이지만)을 높이려들 것이다.

모든 평가는 상반적이다. 평가하는 사람은 평가받는 사람이 맘에 안 들고, 받는 사람은 하는 사람이 맘에 안 든다. 그런데도 평가가 있는 것은 좀 더 잘해보자는 데 있다.

미국대학에는 ‘오피스 아워’라는 것이 있다. 교수가 상담시간을 정해놓는 것인데 그 시간에는 교수가 방에 있어야 한다. 좋게 보면 상담을 장려하는 것인데, 거꾸로 보면 교수가 학교에 없어도 된다는 말이다. 게다가 책임시수가 많지 않은 미국교수와 우리를 비교할 수는 없다. 내 방도 학생들이 수시로 찾아와서(우리는 찾아오도록 학과 근처에 배정한다.) 논문을 조용히 쓰려면 쉬는 날 나와야 한다. 그렇다고 오피스 아워를 써놓으면 다른 시간에 오지 말라는 말처럼 들릴까 봐 그러지도 못한다.

우리 학교는 평생 사제제도가 있다. 강제적으로 이어놓은 것인데, 처음에는 어차피 자주 어울리는 데 굳이 필요할까 했지만 숫기없는 학생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적극적이 되었다. 게다가 돈까지 보태주니 1석2조다. 질 평가로 국립대학의 필요성이 국민에게 제대로 인식되었으면 하는데, 혹여나 그 반대가 될까 근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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