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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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성 <수필가>
  • 승인 2014.01.2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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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재성 <수필가>

지난 가을, 집 주변 남한강지류인 강가에 나 갔다가 돌멩이 하나를 주워왔다. 혼자서는 온 힘을 다해 낑낑거려야 겨우 들어 올릴만한 것이었으니 작은 바위라고 해야 더 적당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수석을 사랑하거나 관심이 있어 일삼아 찾지는 않았으나 흡사 사람 얼굴을 닮은 모습이 기이하고 신기하여 눈길을 빼앗겨 욕심을 낸 것이다.

오석(烏石)도 아니요 청석(靑石)도 못 되는 붉으스레한 차돌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난 요즘 마당 가에 세워둔 이 작은 바위 얼굴을 바라보는 재미로 무료한 시간을 쏠쏠하게 보내고 있다. 지나온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많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얼핏 보면 우락부락하고 험상궂은 얼굴에 심술이 가득해 보이기도 하지만 또 어찌 보면 삶에 지치고 찌들어 고뇌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머리부분에는 백발이 성성한 걸로 봐서 나이가 중 노인네는 넘어 보인다. 마치 만고풍상을 다 겪은 후 해탈이라도 한 듯 평온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내 눈에 콩깍지가 끼어서 일까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너새니얼로손의 ‘큰 바위얼굴’과 비유되는 명품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 중에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코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는 것이다. 콧대가 살아 있었더라면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요즘 유행한다는 성형수술이라도 시켜 볼까 하다 생각만으로 접고 말았다. 그렇게만 한다면 보기야 좋겠지만 내 자신을 예쁜 포장지로 속을 감추는 것만 같아 멀미를 느끼는 것이다.

애당초에는 이목구비가 또렷한 만큼 콧대도 오뚝하였으리라. 오뚝한 콧대를 앞세워 시도 때도 없이 행세깨나 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 도가 지나쳐 주변으로부터 원성이 가득하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장마 통 흙탕물이 범람하던 날 콧잔등이 부러지도록 뭇매를 맞는 수모를 겪은 후 저렇게 내려 앉지 않았을까.

흔하게 우리들이 생각하는 콧대가 높다고 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인격일까? 자존심일까? 과시욕일까? 어쩌면 이 또한 자신만이 살아 남기 위한 방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다. 그렇다면 방패와 비수를 겸한 다기능의 무기라 할 수도 있겠는데 그 비수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아파한다면 결코 높은 콧대를 자랑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젊은 패기만큼이나 가진 것 없이 분에 넘치는 마음의 콧대를 추켜 세우고 경거망동하던 시절이 낸들 왜 없었겠는가. 남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내 주장만 주구장창 내 세우던 일, 조금이라도 만만해 보인다 싶으면 쓸데없이 거들먹거리던 일, 삶의 터전이 전장 같다는 생각에 선제 공격이 최선의 방패라는 일념으로 의례적으로 콧대를 세우던 일, 이 얼마나 무식했던 삶이었던가. 일일이 나열 할 수 없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참 멋쩍고 부끄럽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분들 앞에 서면 나는 이제 움츠리게 되고 마냥 작아 진다. 설령 그 모습이 허세라 여겨 질 지라도 반박하거나 격론을 벌일 생각도 없다. 그 허구성에 휩쓸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일일이 대꾸하고 참견하는 일이 또한 내 콧대를 내 세우는 일이 될 수도 있을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작은 바위의 그 모습은 늘 변화하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내 기분에 따라 오늘도 울고 웃고, 슬퍼하고 고민하며 일상의 고뇌하는 모습으로 내 옆에 있다. ‘큰 바위 얼굴’을 보며 어니스트는 희망을 꿈꾸었고 덕망을 쌓아 모든 주민이 우러러 보는 그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 되었다. 난 이 작은 바위의 얼굴을 보며 콧대 부러진 나의 자화상을 그려 본다. 이제는 흘러간 세월을 뒤 돌아보며 쓴 웃음 지을 일은 하지 말아야 할텐데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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