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없는 세상
달력 없는 세상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1.20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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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이 진부한 질문에 아직도 정답은 없고, 그래서 앞으로도 이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달력이 먼저인가? 세월이 먼저인가? 이 질문은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답은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사람들은 이성적인 것을 일부러 회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시계가 고장난다면 시간이 멈춘다거나, 달력이 없으면 세월도 흐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을 해도 이를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대신 그럴싸하다고 추켜세우는 게 일반적이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은거(隱居)의 일화만을 남기고 있어 태상은자(太上隱者)라고 불리는 당(唐)의 시인은 달력 없는 세상을 의미심장하게 그려냈다.

 

◈ 사람들에게 답함(答人)

偶來松樹下(우내송수하) : 우연히 소나무 아래로 와서

高枕石頭眠(고침석두면) : 돌베개 높이 베고 잠을 잤네  

山中無日曆(산중무일력) : 산속이라 달력이 없어

寒盡不知年(한진부지년) : 추위가 지나가도 어느 해인 줄을 모르겠네

 

※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시인은 적어도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시인이 소나무 아래에 와서 깃들게 된 것도 우연일 뿐이었다. 소나무는 지조와 기개를 상징하는 나무로 보통 산속에서 자란다. 여기서는 속세와 절연한 고고한 기품을 상징하기 위해 소나무가 등장하고 있다.

속세의 욕망과 번잡한 인사로부터 해방된 은자(隱者)의 거처로는 산속의 소나무 밑이 제격이다. 소나무는 은자(隱者)의 고고한 인품을 상징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무소유(無所有)의 개념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속세 같으면 최소한의 주거 공간인 초라한 집조차도 없는 것이다. 집이 없고 소나무 밑에 기거하니 잠을 자기 위한 침구가 있을 리 없다. 소나무 밑에 있는 돌을 베개 삼아 누워서 잠을 잔다. 깔고 덮을 이부자리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그야말로 무소유(無所有)의 정수(精髓)이다. 산속의 소나무 아래서 돌 베게를 베고 잠을 자는 것으로 물질적 무소유(無所有)를 표현했지만 시인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 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산속에서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영위한다 하더라도 세월 흐르는 것은 속세나 마찬가지이다. 세월 가는 것까지도 의식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시인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이것을 시인은 산속이라 달력이 없다는 말로 나타냈는데 참으로 절묘한 형상화(形象化)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존재들이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속세를 떠나 무소유(無所有)를 추구하는 은자(隱者)들의 바람 아니던가? 추위가 사그러졌지만 해는 모른다는 표현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생존하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관념이나 상상으로도 그려내기가 결코 수월하지 않다. 물질적으로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구현하는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정신적으로 시간의 속박과 한계에서 벗어난 경지는 과연 무엇일까? 소나무 밑에서 돌 베게를 하고 잠을 자고 달력 없이 겨울을 나는 것이 그러한 모습이요, 경지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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