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남자(2) -단재 신채호
겨울 남자(2) -단재 신채호
  •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
  • 승인 2014.01.1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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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단재가 체포된 장소는 대만 기륭항이 아닌 기륭우체국으로 밝혀졌다. 기륭우체국에서 붙잡힌 단재는 대련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으로 이감되어 결국 그곳에서 돌아가시고 만다.

단재 기념관에 근무할 때면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아쉬움이 참으로 많다. 신채호 선생님께서 여순 감옥에서 돌아가시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의 고대사가 바로 세워지지 않았을까. 조선상고사를 끝까지 집필하셨다면 우리의 고대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지난해 11월 중국의 대련항과 여순감옥, 그리고 북경으로 단재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답사를 다녀왔다. 여순감옥에 들어섰을 때 사람 키 높이 몇 배에 달하는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담장과 253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붉은 벽돌 건물은 사람을 압도했다. 단재가 머물렀다고 추측하는 방을 들여다보는 순간 삶에 대한 희망과 역사 연구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던 단재 생각으로 나도 모르게 울컥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저 차디찬 감방에서도 면회 온 지인에게 건강한 몸으로 감옥에서 나가 못다한 역사 연구를 완성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했던 사람. 여순 감옥을 나서며 이국땅 그 좁고 차가운 감옥에서도 오로지 조국만 생각했을 단재를 상상했다. 간절히 그리운 날이다. 세월은 흘렀어도 변한 것 없는 중국의 하늘인데 가신 단재는 오지 않는다.

1920년 단재는 생애 따뜻한 봄빛과도 같았던 운명의 여인 박자혜를 만난다. 박자혜 여사는 3·1운동 당시 간우회 사건을 주도해 일본의 감시를 피해서 북경대학에 유학 중이었다. 장남인 수범이가 태어났던 차우떠우후퉁. 지금 중국은 거센 개발 바람으로 놀라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지만 그곳은 아직도 1920년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골목 속에 또 다른 골목이 몇 개씩 형성되어 있었고 작은 집들이 마치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어 숨어 살기 좋은 그런 곳이었다. 초라하기 이를데 없는 그 건물들은 가난했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부부의 애틋한 사랑을 기억하고 있을까.

단재는 떠나고 없어도 그를 찾는 이들의 발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을 찾는 분들은 초등학생에서부터 단재를 연구하는 박사과정의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해설을 거치지 않으면 놓치는 것들이 있다.

단재는 돌아가신 후 2등급인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인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2등급을 받았다고 설명을 하면 대부분 왜 1등급을 받지 못했냐고 묻는다. 등급을 정하는 기준이 있다. 독립운동을 몇 년 했느냐, 옥고를 치른 사실과 옥고를 치른 사실이 있다면 몇 년을 치렀는가. 친일의 유무 등이 등급을 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많다. 그리고 단재기념관에 와서 해설을 들어야만 알 수 있는 일화들이 있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바로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혀 바로 알게 할 것이다.” 유명한 단재의 어록 중 하나다. 우리의 한국사가 각종 시험에서 빠지고 그동안 홀대받았다는 사실을 단재께서 알았다면 어찌했을까. 이 어록을 나는 오늘도 관람객 앞에서 수없이 강조한다.

평생을 겨울처럼 살았던 단재를 위한 애국심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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