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남자(1) -단재 신채호
겨울 남자(1) -단재 신채호
  •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
  • 승인 2014.01.05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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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

혹한의 날씨에도 당당히 추위와 맞서고 있는 겨울나무를 보면 한 사람이 생각난다. 평생을 겨울처럼 춥고 외롭게 살았던 사람. 아마도 따뜻한 봄빛 같은 시간은 2년여 정도의 신혼생활이 전부이지 않았을까.

그의 초상화 앞에만 서면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라도 올려놓은 듯 마음이 무겁다. 왜 그러셨어요? 병보석 신청하셔서 나온 후에 몸 추슬러 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으시고…. 보증인이 단지 친일파라는 이유로 거절하시고 왜 그 차디찬 남의 나라 감옥에서 돌아가셨어요? 관람객이 없는 시간이면 나는 그의 초상화 앞에서 늘 이렇게 소리없는 대화를 나누곤 한다.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외가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8살에 할아버지의 고향인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드미마을로 이사를 온다. 그래서 성균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약 11년여를 이곳에서 살았다.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간 단재는 우리나라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배운다.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내정 개혁을 위해 조직한 독립협회에 들어가 활발한 활동을 하지만 일본은 갖은 탄압을 가한다. 당시 문서담당이었던 열아홉살 단재도 감옥에 갇혔지만 대한제국 관료인 신기선의 도움으로 풀려나 다시 성균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단재에게 신기선은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훗날 대한매일신보에 주필로 활동하던 단재는 ‘일본의 3대 충노’라는 사설로 신기선을 고발한다. 스승으로 존경은 하지만 일제 정책에 동조해 민족반역자로, 매국노로 규탄한다는 글을 써서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기자로, 주필로 활동했던 단재는 논설을 통해 백성계도를 한다. 나라를 지키는 큰 힘은 무엇보다 역사의식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김춘추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통일을 한 것,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세운 발해를 이민족의 나라로 간주하여 역사에서 빼버린 것은 과거의 역사관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이런 역사의 영향으로 큰 피해를 볼 것을 단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중화사상으로 쓴 역사는 중국에 종속되게 하고, 식민사관으로 쓴 역사는 식민지가 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재는 우리 역사를 민족을 살리는 역사로 다시 써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사실 이런 역사의식 때문에 우리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고 지금도 중국의 동북공정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1910년 단재는 안창호와 함께 망명길에 오른다. 망명활동의 중요한 부분은 3·1 운동 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크게 공헌한 것이다. 그리고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의 고문으로 ‘조선 혁명 선언서’를 만들어 대항하지만 일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본을 막기 위해서는 폭탄제조소 설치 등 항일 자금 마련을 위해 무기를 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수표를 위조한다. 그리고 위조한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단재는 기륭항에서 내려 우체국으로 향한다.

※ 필진소개

1998년 <창조문학>으로 등단. 한국 문인협회, 청주 문인협회 회원, <비존재> 동인. 2007년 수필집 <만드는 중> 출간. 현재 충북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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