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규 시인의 문학칼럼
김창규 시인의 문학칼럼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9.15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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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울린 평양의 부벽루(浮碧樓)
대동강변 멀리서 부벽루가 보였다. 평양에 와서 부벽루를 가보지 못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평양을 다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달래주는 글이 있어 독자들에게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2005년 '청년문학' 7월호에 실려 있다

'예로부터 평양의 경치는 '천하제일강산'으로 불려왔다. 유유히 굽이쳐 흐르는 대동강, 강가에 실실이 흐늘어진 수양버들, 높낮은 산발을 끼고 띠처럼 에돌아간 성곽, 어디에나 사람들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깎아지른 듯 한 절벽위에 금세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은 부벽루에 올라서면 또 어떠한가. 거기서 산천경개를 바라보면 그야말로 인간세상과 동떨어진 선경을 마주한 듯 한 황홀감에 빠지게 된다.

발밑에선 물이 출렁이고 강너머엔 눈뿌리 아득히 넓은들이 펼쳐졌는데, 그 벌이 끝나는 먼 곳에 하얀 띠오리 같은 운무가 서리고, 그 속에 바다속에 섬같은 봉우리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었다.

참으로 취할 듯 한 풍경이었다.

그리하여 먼 옛날부터 많은 제사들이 부벽루에 찾아와서는 그 절경에 심취되어 절묘한 시구들을 고르고 다듬어 제나름의 명시들을 남기였다. 그 시편들이 현판에 적히여 루각의 기둥과 천반에 걸려 있었다.

고려때 이름높은 명시인의 한 사람이라고 일러오던 김황원이도 이곳에 처음 와보고는 '아 이세상에 이런 절경이 또 있단 말인고'하고 감탄을 금치 못해 하였다. 그는 현판에 적혀 있는 시들을 보고는 쓴입만 디시였다. 그 어느것도 부벽루의 절경에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현판들을 모두 떼내려 불사르라고 명령하였다. 그럴 만큼 시적재능이 뛰어난 당대 명시인이기도 하였다. 함께 왔던 문사들이 그더러 명작 한편을 남기고 가라고 권고하였다. 그러자 김황원은 자신있게 머리를 끄떡이고나서 란간에 두손을 얹고 이윽고 산천경개를 둘러보더니 마침내 꾹 닫겼던 입이 열리면서 격조높은 시구가 튕겨나왔다.

긴 성벽에 한면엔 사품쳐흐르는 물

넓은 들 동쪽엔 웅긋붕긋 솟은 산

사람들은 기대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명시인답게 첫 구절을 그럴 듯하게 떼였으니 다음구절도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고 믿었다. 한데 시인은 오랫동안 입귀만 실룩거릴 뿐 더는 아무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어느덧 날은 저물고 눈앞에 펼쳐졌던 황홀경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때까지도 안타까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모지름을 쓰던 김황원은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아 나의 재능이 이렇게 무딘줄 몰랐구나…. 어쩌면 평양의 경치가 이토록 무색하게 만든단 말인고' 그것은 당대 명시인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시인일지라도 한갓 자연의 유람객에 그치고 그 현실을 '내 것'으로 뜨겁게 사랑하지 않을 때에는 명작을 써낼 수 없다는 것을 아마도 그는 모르고 있는것 같았다. 김황원은 그후 몇날 몇밤을 고심하여 시 한수를 완성하였으나 그것이 후세사람들까지도 즐겨 읊는 명시로는 전해지지 못하였다고 한다.'

평양의 아름다운 경치를 다 감상하고 오지 못했어도 이 짧은 글 한편으로 대동강 부벽루의 경치가 눈에 선하게 떠오를 것이다. 대동강 모란봉 청벽루에 올라앉은 부벽루는 고구려 때 절 영명사의 부속 건물로 세워졌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군대가 불사르고 없어져 다시 누대가 중건 된 것은 1614년 광해군 6년이라고 했으니 역사가 그리 오랜된 것은 아니다. 우리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교과서에 실렸던 '대동강' 그 글이 지금에 와서 다시 떠오르는 것은 김황원(金黃元 1045-1117) 미완의 시 때문이 아니라 유명한 부벽루 경치였던 것이다. 이 시는 지금은 부벽루가 아닌 연광정에 그 원문과 번역문이 걸려 있다.

長城一面溶溶水 긴성벽 한쪽에는 늠실늠실 강물이요.

大野東頭点点山 큰들판 동쪽머리엔 띄엄띄엄 산들일세.

평양을 방문하고 머무는 동안 명승고적을 본 것은 딱하나 보통문(普通門)이었다. 이문을 수시로 오며가며 보았지만, 부벽루에 오르지 못하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보통문은 임진왜란, 6·25전쟁에도 불타지 않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신문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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