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 표범
순한 표범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13.12.19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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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남편은 삼십여년, 아니 정확하게 삼십삼년을 새벽에 출근하여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직장인이었다. 정년 5년을 남겨두고 명예퇴직을 했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 어차피 본인이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어야 젊은 사람이 그 자리에 가서 일을 한다는 것이다. 젊어 한때는 이 직장 아니면 못 먹고살겠는가 싶어서 여러 번 그만두려고도 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청춘을 다 보낸 직장을 막상 그만둘 때가 되어 돌아보니 고맙고 아쉽단다. 나는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삼십삼년 고생 했으면 이제부터는 당신인생 즐길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위로했다.

지난 여름 남편의 고등학교 동문모임이 있었다. 정년퇴직 하신분도 계시고 아직 현직에 계시지만 대부분 퇴직을 눈앞에 두고 계신 분들이다. 남편의 명예퇴임을 두고 선배님들은 5년이나 더 할 수 있는데 왜 벌써 그만두느냐고 다들 반대했었다. 그러면서 우스갯소리로 여기는 동문모임이 아니라 장로님들(장 노는 사람들) 모임이라고 했다. 남편은 그날부터 변 선생에서 변 장로님이다. 한술 더 떠 남편의 선배 부인께서 자기남편은 퇴직한지 오래되었으니 한 직급 높은 목사님(목적 없이 사는 사람) 이시란다. 자기는 교회한 번 가보지 않고도 목사 사모가 되었으니 횡재했다고 해서 또 한바탕 웃었다. 서로 장로님, 목사님하면서 웃었지만 젊어 한때는 *짐승의 썩은 고기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가 아닌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정글의 중심에서 호령을 하던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자존심이 강하여 비리와 타협하지 못하고 맞서 싸우던 고독한 표범 같은 선배님들이시다.

남편은 퇴직하고 처음 얼마 동안은 우울해 했었다. 새벽에 출근 할 일 없으니 편안하다고도 했다가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잘 수 있어서 좋다고도 했다가, 자기마음도 마음이 아니었나보다. 오랜 시간 틀에 박힌 생활을 하다가 어느날부터 규칙 없이 행동하려니 갈피를 잡지 못 하는 것 같았다. 하루는 낚싯대를 챙겨나가고, 하루는 골프채를, 하루는 배낭을 메고 나가고 그렇게 쉴 새 없이 나가도 허전해했다. 소속이 없어진 불안감으로 힘들어 했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남편처럼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까지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사회일원으로 국가발전과 가족 부양을 짊어졌던 가장으로의 길을 걸어왔다. 직장에 충실하느라 가족들에게 소홀했던 죄책감으로 스스로 죄인이 되어 그들은 잘 못 한 것 없이 주눅들어 있다. 남편도 그렇다. 시키지 않아도 청소도하고 부엌에 들어오면 큰 일 나는 줄 알던 사람이 부엌에도 들어온다. 그런 모습에 낯설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제 막 중심에서 비켜선 언저리인생이다. 그렇다고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언저리에서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아 주는 어른으로 돌아온 것이다. 힘이 빠진 표범이 아니라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지혜롭고 순한 표범이 된 것이다. 이제는 쫓기는 삶이 아니라 여유로운 삶, 시간을 지배하는 진정한 야성을 발휘할 수 있는 표범으로 돌아온 것이다. 민첩성도 떨어지고 아름다운 무늬도 윤기를 잃었지만 늙어도 표범은 표범이다. 아직 자존심은 살아있다. 누가 들으면 시대에 뒤떨어졌다 할지라도 나는 순해진 그를 그래도 표범으로 인정해 줄 것이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노래가사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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