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大雪)의 마법
대설(大雪)의 마법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12.1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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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겨울의 진객(珍客)은 뭐니뭐니해도 눈이다. 눈 중에도 산과 들판을 두껍게 덮은 대설(大雪)이다. 봄, 여름, 가을을 거치면서 나름의 빛깔과 모습을 지켜왔던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사물들은 한겨울의 대설(大雪)을 만나면, 모두 같은 빛깔의 옷으로 갈아입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대설(大雪)은 자신의 빛깔 외에 다른 빛깔을 허용하지 않는, 자연의 독재자이며 동시에 혹독한 겨울 추위를 막아주는 방한복(防寒服)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설(大雪)은 겨울의 장관(壯觀)을 연출하지만, 이것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같은 빛깔에 모습도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신흠(申欽)도 대설(大雪)을 묘사하기가 쉽지는 않았던 듯하다.

◈ 큰 눈(大雪)

塡壑埋山極目同(전학매산극목동) : 골 메우고 산을 덮어, 천지가 한 세계

瓊瑤世界水晶宮(경요세계수정궁) : 영롱한 옥빛 세상, 반짝이는 수정궁궐이로다

人間�-흰근將�(인간화사지무수) : 인간 세상 화가들이 무수히 많겠지만

難寫陰陽變化功(난사음양변화공) : 음양 변화 그 공덕을 그려내기 어려우리라



※ 골짜기는 골짜기대로, 산은 산대로, 메우고 덮은 것은 오직 눈이었다. 눈 닿는 곳(極目)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설(大雪)이 내렸다. 시인은 눈 덮인 골짜기와 산을 묘사하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는 듯, 그저 골짜기를 메운다거나(塡) 산을 묻었다고(埋) 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대설(大雪)의 크기만을, 그것도 아주 무미건조하게 말할 뿐이다.

봄에 핀 꽃으로도, 여름에 내린 비로도, 가을에 떨어진 낙엽으로도 골짜기가 메워진 적은 없었다. 오직 겨울에 내리는 눈만이 골짜기를 메울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산은 어떠한가? 보통의 경우, 산은 다른 사물을 묻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산을 묻어버리는 무언가가 있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시인은 대설(大雪)이라고 대답한다. 보이는 곳은 모두 한가지로 눈에 덮인 세상은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세세하게 묘사하기에는 너무나 빛깔이나 모습이 비슷비슷하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은 말로 형언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예 인간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통째로 옮겨놓기로 하였다.

경요(瓊瑤)는 아름다운 옥돌로, 경요(瓊瑤)세계는 신선인 서왕모(西王母)가 기거하는 선계(仙界)이다. 그러한 옥으로만 된 신선 세상에 수정(水晶)으로 만든 궁궐을 지었는데, 그 궁궐의 모습이 바로 대설(大雪)이 내린 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불로장생(不老立?)의 신비로움에 옥이나 수정의 희고 맑은 아름다움이 더해진 것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시인의 찬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이 그림을 그린 역사에서 무수(無數)한 화가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음양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공덕(功德)을 그려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이 말한 음양변화의 공덕(功德)은 다름 아닌 대설(大雪)이 내린 세상이다. 표현 불가의 한계에 대한 한탄을 통해서 에둘러 대설(大雪)의 장관을 말하는 시인의 솜씨가 탁월하다.

하룻밤 사이 세상을 가장 극적으로 달라 보이게 하는 것이 대설(大雪)이다. 나뭇잎이 모두 져서 앙상하게 된 나무들에 순백의 꽃이 피는가 하면, 스산함이 흐르던 골짜기에 흰 주단 카펫이 깔리기도 한다. 이 모두가 대설(大雪)이 사람에게 베푸는 은총이고, 그래서 혹독한 겨울일지라도 살아 볼만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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