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다
눈이 오다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3.12.11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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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사람은 눈이 오면 왜 좋을까? 우리 철학이라는 것이 묻고 또 묻는 것이라서 이런 것도 물어야 한다니 어처구니없겠지만, 눈이 오는 날 안 물어볼 수도 없다. 이를테면 ‘미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왜 아름다움을 느끼냐?’(정확히는, 우리가 왜 감동을 받느냐)고 묻는 학문이다. 묻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문학’이라면, 굳이 묻는 것이 ‘철학’이고 ‘미학’이다.

택시 기사에게 물었다. 눈이 와서 운전하기 나쁘죠? 대답은 의외다. 운전하기야 나쁘죠. 그래도 기분은 좋습니다. 만일 ‘이득’이나 ‘현실’을 문제 삼는다면 눈이 안 오는 것이 낫다. 그러나 받아들이고, 나름 즐긴다. 그렇다면, 눈이 오는 것은 이익과는 상관없다는 말이다.

농부에게 묻자. 눈이 와서 좋습니까? 좋지요. 왜요? 그래야 물이 늘어나고, 곡식을 덮어주어 따뜻하니까요. 이것은 이익의 문제다. 그러나 농부가 단순히 농사에 도움이 된다고 좋아하지는 않는다.

군인에게 묻자. 눈이 와서 좋은가? 모든 것을 다 덮어주는 것 같아 좋습니다. 마음도 깨끗해져서 좋습니다. 그러나 공군비행장에서 근무하던 군인은 눈만 오면 학을 띤다. 요즘이야 기계로 많이 치우지만, 그래도 비행장의 눈을 치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아무리 좋아도 신역이 고되면 싫다. 산이 좋았지만 산악부대에 배치되고는 평생 산을 가지 않는다던가, 바다가 좋았지만 3년 동안 바다만 보고나서 신물이 난다는 제대군인을 본다.

어린 아이에게 묻자. 눈이 와서 좋니? 정말 좋아요. 왜? 신나잖아요. 뭐가?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고, 마당에서 뒹굴 수도 있고요. 어린 시절 눈이 많이 오는 곳에서 산 적이 있는데, 정말 신났다. 이글루도 만들고, 성채도 쌓고 그랬다. 추운 줄도 모르고 왜 그렇게 놀았는지. 형제라는 것이 그때는 그렇게 좋았다. 혼자보다 둘이 만들어야 일이 되었다. 그러면 눈이 오면 좋은 것이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그런가? 눈은 곧 동심인가?

노인에게 물었다. 눈이 와서 좋습니까? 그렇고 말고. 죄 많은 내 인생을 다 덮어주는 것 같아. 남의 허물도 덮어주고 말이야. 살면서 죄도 많고 허물도 많은데, 하늘에서라도 이렇게 덮어주니 좋으이. 숨기고 싶은 것을 알아서 숨겨주니 말이야. 자연현상인데도 인간의 삶과 연결시켜 상상한다. 시적으로 눈을 사랑하는 거다.

화가에게 물었다. 눈이 좋아요? 그럼요. 언제나 이렇게 하얗게 세상을 칠해 볼 수 있을까요? 눈은 설치미술이고 조각이고 퍼포먼스에요. 운동장에 하얀 천을 깔아놓을 생각을 해보았어요? 다른 색이라도 좋고요. 저 탑을 하얀 천으로 덮어보아요. 다르게 느껴지잖아요. 나무가 하얀 꽃을 피우는 것을 보세요. 하얀 산천의 장관, 너무좋지 않아요? 눈은 예술이에요. 눈은 예술가의 장난이라고요.

철학자에게 물었다. 눈이 좋습니까? 예, 눈을 좋아하는 것은 내리는 눈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지저분하게 녹는 눈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윤리적이지만 어렵다.

나무에게 물었다. 눈이 좋니? 좋긴 좋은데 너무 무거워요. 쟤네들처럼 가을에 잎을 다 떨군 녀석들은 아무리 눈이 와도 무겁지 않은데, 저처럼 겨울에도 잎이 달린 나무에는 눈이 쌓여 가지가 툭툭 부러져요. 상록의 소나무가 겨울을 지켜내지만, 그 대가로 가지를 내놓아야 해요. 그렇다고 활엽수처럼 얍삽하게 잎을 다 털어낼 수도 없고요. 늘 푸름의 대가가 너무 크네요. 그렇지만, 어떤 시인은 말하데요. 눈이 와서 소나무가지 꺾어지는 소리가 가장 멋있다고요. ‘청송’(聽松)의 절정은 그 소리래요. 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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