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죽이다
또 죽이다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3.11.27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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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또 죽였다. 기르던 허브를 또 죽였다. 저번에는 거름을 많이 줘서 죽이더니 이번에도 뭔가 잘못했다.

너무도 잘 자라던 놈이었다. 웃자랐다고 느낄 정도였다. 잎사귀나 줄기도 보통보다 크게 자랐고 그래서 무성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아니, 그런 놈을 죽여 버리다니 나는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는가?

잎이 나는 것이 장미를 닮았다고 ‘로즈’라는 이름이 붙은 허브다. 우연히 3천원에 산 허브인데 나같이 게으른 사람을 만나서도 잘 자라줬다. 햇볕은 좋아하는데 물은 자주 안 줘도 됐다. 물을 안 먹는 것인지 공기 중에서 빨아들이는 것이지는 모른다. 그럴 정도로 물을 주지 않아도 잘 자라준다. 여기까지는 일반론이다.

생물이란 것이 워낙 오묘해서 지금부터는 특수론이다. 달리 말해서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물을 안 줘도 죽지 않고 잘 살아있어 난 이놈이 물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꺾어진 줄기를 컵에다 담아놓고 잊어버렸는데, 뿌리가 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 녀석은 물을 좋아하는데, 내가 안 줘서 굶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또 문제는 물을 많이 줘서 물이 빠지지 못해 썩은 경우도 있었다. 흙속에 물이 질퍽대는 것과 물속에서 맑게 노는 것의 차이인지, 아직 모르겠다. 이놈은 물을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이렇게 꽂아서 즐기고 있는 관상용 식물이 내 연구실에는 또 있는데, ‘산세베리아’라고 불리는 녀석이다. 공기를 정화하는 기능이 있다고 해서 얻어 놓은 것인데, 옆가지가 떨어져나가서 어쩔까하다, 물속에 넣어두었더니 잘 자란다. 생긴 것은 선인장처럼 보여서 물을 싫어할 것 같은데 아니었다. 옆으로 앙증맞게 새끼를 잘 쳐서, 벌써 시집을 몇 번이나 보냈는지 모른다. 지금은 내 방에 들린 누가 과감하게 떼어가는 바람에 난쟁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작은 놈이 더 관상용으로는 보기 좋다. 그런데 이놈도 물에 담가놓는다고 반드시 살지는 않는다. 어떨 때는 짓무른다. 그래서 이 녀석도 물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잘 모르겠다.

로즈 허브의 경우, 어느 정도 자라면 줄기가 색이 변하면서 딱딱해진다. 그쯤 되었을 때, 부드러운 가지를 잘라 심으면 잘 자란다. 그런 점에서 칼을 대는 것이 그다지 미안하지 않은 놈이다. 잘라서 딴 곳에 또 살리려는 것이기에 나는 잔인한 칼잡이라는 자책감에 빠질 필요도 없다. 전지를 할 때처럼 ‘이것이 옳은 짓인가’라고 묻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덕분에 화분을 만들어서 선물도 할 수 있었다. 화분이나 흙을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옮겨 심는 것은 약간의 노력을 필요로 했다. 날 잡아 펼쳐놓고 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자갈이나 망사로 막고, 모래도 깔고, 작지만 할 것은 다해야 했다.

내가 죽인 허브는 정말 잘 자라던 것이었다. 화분도 작지 않았다. 그래서 정리할 겸 분갈이를 했는데, 문제는 내가 너무 잘랐는지 바짝 말라 죽어버렸다. 나의 추론은 이랬다. ‘잎을 너무 잘라 죽었다.’‘겨울이 오는데도 잎을 잘라서 죽었다.’‘잎을 잘라도 사는데, 그 전에 준 거름 때문이다.’‘어릴 때는 괜찮지만 가지가 굵어져 시커멓게 되었을 때 잎을 모두 잘라버리면 죽는다.’ 그러나 아직도 왜 죽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내 알량한 과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보니 글쎄, 볕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여름 내내 창가에서 햇볕을 받게 했더니 잎이 시들어버린 경우를 봤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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