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호박에 얽힌 추억
예쁜 호박에 얽힌 추억
  • 엄갑도 <전 충청북도중앙도서관장>
  • 승인 2013.11.21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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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엄갑도 <전 충청북도중앙도서관장>

아내는 누렇게 잘 익은 호박 두 덩이를 거실에 쌓아놓고 가을의 정서를 감상하면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호박을 보는 순간 20년 전에 호박에 얽힌 추억이 떠올라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코스모스꽃밭에서 새로 찍은 사진을 보며 흡족해 하는 아내를 보고, 그 사진을 건네받아 보면서 무심결에 “예쁜 호박이구먼.”하고 불쑥 한마디를 했던 것이다. 다음 순간 앗차! “모나리자의 미소로군.”이라고 해 줄 걸 하고 후회하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하필이면 호박이 뭐예요.” 끝내 섭섭하다는 가시 돋친 말이 아내한테서 나오고 말았다.

호박이란 말은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잘 몰라도 못난 여자를 비유할 때 흔히들 쓰는 말이란 것을 잠깐 망각한 게 불찰이었다. “아니, 그냥 호박이 아니고 예쁜 호박이라니까.” 이렇게 급한 대로 둘러대 놓고서, 늦여름에 생전 처음 본 화초 호박 이야기를 들려주어야만 했다.

충청북도단재교육원 총무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단재교육원 앞동산에 있는 크고 작은 소나무 숲, 산책길이 일품이었다. 나는 점심 식사 후 머리를 식힐 겸해서 이 소나무 숲 산책길을 자주 거닐곤 했다. 그 동산 끝의 얼마간의 빈 터에 직원 한 분이 호박을 심어 놓았다. 무성하게 자란 호박 넝쿨 사이사이로 큼직큼직한 호박들이 꽤 많이 달려 있었다. 넝쿨에 달린 호박들을 보면 문득 정을 남기고 흩어져간 고향 친구들의 모습이 어른거려 향수에 젖어보기도 했다.

그 날도 점심 식사 후 몇몇 동료들과 함께 앞동산 소나무숲길 산책을 하면서 호박 넝쿨 옆을 지나고 있었다. 한참 누렇게 익어가고 있는 호박 빛깔에서 가을이 묻어오고 있었다. 문득 한쪽에 전에 보지 못했던 호박넝쿨 한 더미를 발견했다. 무성하게 자란 잡풀 속에 잎이 연하고 크기가 훨씬 작은 호박넝쿨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넝쿨 군데군데에 사과보다 조금 큰 빨간 진홍색의 예쁜 호박이 올망졸망 꽤 많이 달려 있었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참으로 예쁜 호박이었다. 저 편의 큰 호박들이 머리에 수건 쓰고 날마다 들판에 나가 부지런히 일하는 듬직하고 투박한 농촌의 아낙네라면, 이 조그마한 예쁜 호박은 날렵하고 섬세한 몸매에 날아갈 듯이 단정하게 가꾸고 앉아 있는 요염하고 매혹적인 여인이라고나 할까. 그 빨간 빛깔이 아름답다 못해 예술품으로 보였다.

내가 하도 신기하게 감탄하고 있는 것을 본 편 연구사는 그 호박은 화초호박으로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때로는 한약재로도 쓰인다고 설명해 주었다.

아무튼 호박도 호박 나름이지, 앞으로는 여자에게 호박이라고 말한다고 하여 무턱대고 못난 여자를 일컫는 말이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고 얘기했다. 화초호박 같이 예쁜 호박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 쓰는 말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아내는 “농촌에서 자란 분이 그래, 화초호박도 몰랐단 말이에요? 하고 가벼운 핀잔을 주었지만, 얼굴 표정은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훨씬 환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해서 무심결에 불쑥 던진 말 한마디 때문에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할 뻔 했던 일을 용케 넘긴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러 아내는 고희(古稀)를 맞이했다.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은 거실의 호박은 고고(孤高)한 탈속(脫俗)의 기풍이 느껴지는 깊은 명상에 빠져 있는데, 많은 세월의 흔적을 깊이 새겨 놓은 아내의 백발이 햇빛에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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