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호박
황금호박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3.11.10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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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여름내 변변한 호박 하나 따먹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찬바람 부니 성성하게 덩굴을 뻗고 열매를 맺어 호박 한 덩어리를 땄다. 시일이 짧은데도 기후가 잘 맞아서인지 신통방통 잘 영글었다. 요녀석을 끌어안고 흐뭇해 하다가 올겨울 어떤 요리를 해볼까, 아니면 집안을 꾸미는 장식용으로 쓸까 행복한 고민을 했다.

호박은 참 쓸모가 많다. 늙은 호박은 호박죽, 김치 넣은 호박 국, 호박범벅, 내가 좋아하는 호박전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껍데기를 벗겨 말리기도하고 말린 호박은 쌀가루에 섞어 떡을 만들기도 한다.

애호박일 때는 둥글납작하게 썰어서 전을 부치기도 하고 새우젓 호박찌개도 만들고 채 썰어 삶은 국수에 넣어 먹고, 더 자란 것은 데쳐서 무쳐먹기도 한다. 줄기 끝자락의 연한 이파리는 쪄서 쌈으로 먹고, 열린 호박을 다 먹지 못할 때는 가을빛에 썰어 말리면 뽀얗게 마르면서 호박고지가 된다.

아주 어릴 적 늙은 호박에 대한 기억이다. 호박 살은 쇠죽솥에 넣어 삶아서 소에게 주고, 사랑방 아랫목 찢어진 책장에서 비들 배들 말라가던 씨앗, 종자로 쓰고 겨울철 간식으로 까먹으려고 말리는 것이다.

나는 워낙 시루떡 속에 호박고지가 들어있는 것을 싫어했고 호박을 넣고 끓인 김칫국도 먹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식성이 바뀌어서 이제는 호박죽과 호박떡을 좋아한다. 그때의 우리 부모님 나이가 되기도 했지만 아마도 건강을 염려해서일 게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수다 떠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마음도 행동도 모습도 변해가는 것 같다. 늘 새롭게 도전하고 시작하며 실행에 옮기며 열정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던 걸까. 오십 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매사 조심스럽고 멈칫거려진다.

잦은 모임을 갖는 편이지만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는 사는 이야기를 주로 나눈다. 나이 차도 많이 나지만 사회적으로 높은 학식과 덕망도 뒤로하고, 비슷한 성향의 시어머니 흉보기, 남편 흉을 보면서 은근히 자랑하기, 자식 자랑하기, 거의가 우리 삶의 이야기로 마음을 터놓는다. 나이 들면서 좀 변한 것이 있다면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사람도 말이 빨라지고 많아졌다는 느낌을 받을 뿐, 자신들은 최고의 며느리, 아내, 어머니이고, 할머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이가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정말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들을 만나면 배려하는 편한 마음이 전이되는지 덩달아 수다의 극치를 달려 내 마음이 힐링되니 전문가 못지않은 수준의 상담자들이다. 

애호박은 애호박대로 늙은 호박은 늙은 호박대로 쓰임이 다르다. 우리도 어릴 땐 어린 모습 그대로 순수하고 귀엽고 예쁘고, 중년은 중후한 멋과 성숙함이 빛나고, 노년에는 수많은 세월을 살아와 지혜로움이 있을 터, 노력 없이 그냥 아름다워지진 않는 것 같다.

흔히 예쁘지 않은 여자를 보고 “호박꽃도 꽃이냐”고 빈정거린다. 호박은 열 마디만 넘으면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다. 너무 흔한 것이 호박꽃이라서 그렇게 조롱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호박꽃을 자세히 살펴보라. 밤하늘의 별을 닮은 모양에 우리 중년 여성들의 품성이 느껴져 여유까지 있지 않은가.

요즘 서로 삶이 바빠서 호박꽃을 닮은 좋은 사람들이 같이 어울려 여행하는 것도 뒤로하고 있다. 하지만 겨울이 오기 전 우리 황금호박들은 미루어만 오던 여행을 통해 호박꽃 같은 이야기꽃을 피울 것이다.

우리 집 황금호박을 안고서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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