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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상무 <청주외국어고등학교 교장>
  • 승인 2013.11.07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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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강상무 <청주외국어고등학교 교장>

여보! 세월이 흘러 당신과 만나 결혼한 지 어느덧 서른여섯 해가 되었구려. 주름살 속에 익어간다는 부부사랑, 곯아도 젓국이 좋고 늙어도 영감이 좋다지요? 영어표현으로는 아내를 ‘the better gender’라고 한답니다.

당신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가졌기에 그 말을 인정하렵니다. 저는 신혼생활 시작부터 효도한다는 핑계로 당신을 혼자 남겨두었던 못난 놈이었지요. 정말 미안합니다.

11월, 가을이 되면 비가 내리던 날 결혼식이 떠오릅니다. 바람도 조금 불었고요. 분명 가을바람은 추억입니다. 그리고 향기나는 추억은 아름답지요. 결혼과 동시에 고생을 시작한 우리의 가을은 꼭 아름답지만은 않았기에 가을이라는 인생 환승 장소에서 당신과 잠깐 쉬었다가 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더 상처받을까 머무르기 두렵습니다.

부모님의 사업 실패 후 한동안 갈 곳이 없어 단칸방에서 애들과 살았던 시절, 하재성 선배님을 비롯한 동료 교사들이 전해 주신 쌀 한가마니에 눈물 쏟던 시절도 있었네요. 방 두칸짜리 얻어 하숙 치르며 조금씩 살림 늘려가면서 기뻐하던 당신이었고 그러면서도 나의 도시락은 어김없이 최고였습니다.

남들 앞에 기죽지 말라고 사시사철 옷도 사왔지만 한번은 당신에게 미안하여 억지를 부리며 입지 않겠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싸구려 옷이라도 세련되게 입을 줄 아는 당신이 늘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임신 중 잘 먹지 못한 채 출산한 큰 아이가 체중미달인데도 인큐베이터에도 넣지 못했던 그 막막한 마음, 그 마음을 추스르고 딴청을 부리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당신이 밉기도 했지요.

어려운 생활 중에도 예쁘게 커준 순둥이, 멋쟁이, 예쁜이 세 딸들, 시집가더니 이제 우리들에게 회갑 선물까지 주네요. 우리가 사랑으로 처음 만난 지 서른여섯 해, 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고 어려움을 함께할 때 더 쌓인다는군요. 우린 다투기도 많이 했지요. 사랑만 강조했으면 남이 되었겠지만 정 때문에 돌아서도 다시 ‘우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감정표현도 자제하였고 소중한 친구를 놓치기도 하였으며 가족을 위하느라 자신의 행복은 가꿀 줄도 몰랐던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행복도 선택이란 사실을 당신은 부러 모른체했습니다.

인간은 백미러를 보며 산다고 누군가가 그럽디다. 고생했던 백미러 속 세월은 이제 추억 메모장에 보관해두고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봅시다. 우리가 사는 것이 전부 남의 다리를 긁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도 하지요. 이제 당신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오직 가족과 나를 위해 살았으니까요. 빛깔 고운 립스틱도 찾아 바르고 당신만의 생활을 한번 누려 보시구려. 좋아하시는 등산도 하시고요. 열심히 응원할게요.

얼마 전에 우리 결혼 장소였던 히아신스 예식장 앞을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건물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서른여섯해 전 결혼식 장면이 어제 일처럼 떠올랐습니다. 결혼식 당일 야간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지요. 지금이야 비행기타고 신혼여행을 다니지만 우리 때는 어디 그랬나요? 부산역 앞 포장마차에서 당신과 먹었던 우동 한 그릇과 소주 한잔이 생각나네요. 태종대 갈매기 소리도 그립습니다. 해운대 백사장 은빛 모래도 다시 밟고 싶습니다. 12월 학교 학사 일정이 마무리 되면 추억을 곱씹으며 부산을 다녀올까요? 야간완행열차를 타고 가다 어느 역에서 잠시 내려 소주 한잔과 어묵 한 꼬치 후다닥 먹고 다시 열차에 올라탈 것입니다. 내 잠바 주머니에 소주 한병이 들어 있어도, 여보 그땐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당신과 단 둘이서 부산을 가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 11월 깊어가는 가을에 만나 세월이 흘러 강산이 세 번 하고도 한참 더 바뀌었어도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가을바람보다도, 꽃보다 붉은 가을 산보다도 더 아름답습니다. 여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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