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과 비타민
낙엽과 비타민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10.28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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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가을은 풍성한 계절이다. 오곡백과가 풍성한 것이야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이것보다도 더 풍성한 것은 사실 낙엽(落葉)이다. 산이고, 들이고, 강이고, 심지어는 집안 마당이고, 나무가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낙엽은 수북이 쌓인다. 이처럼 차고 넘치는 낙엽을 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쓸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운치를 느끼는 사람도 있다. 물론 낙엽이 반갑지 않을 수도 있다. 조선의 시인 김시습(金時習)에게 낙엽은 과연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 낙엽은 지고(葉落)

落葉不可掃(낙엽불가소)

떨어지는 나뭇잎은 쓸어내면 안 되리

偏宜淸夜聞(편의청야문)

오로지 맑은 밤에는 그 소리를 들어야만 하네

風來聲摵摵(풍래성색색)

바람 불면 우수수 이리저리 날리고

月上影紛紛(월상영분분)

달 떠오르면 그림자 어지럽게 비치네

敲窓驚客夢(고창경객몽)

창을 두드리며 나그네 꿈 놀래 깨우고

疊砌沒苔紋(첩체몰태문)

뜰에 쌓여서는 이끼 자취 묻어주네

帶雨情無奈(대우정무내)

비 맞으니 마음으로 어쩌지 못하네

空山瘦十分(공산수십분)

빈산에서 아주 야위어 버리는 것을

 

※ 이른 새벽 길거리를 청소하는 이에게 낙엽은 천덕꾸러기일 수밖에 없다. 쓸고 나면 또 떨어지는 낙엽이 원망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낙엽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이다. 함부로 쓸어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시인은 맑은 가을밤이면 만사 제쳐두고, 오로지 낙엽 소리를 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가을의 정취를 낙엽 소리를 통해서 느끼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낙엽은 이리저리 나뒹굴며 소리를 제법 크게 내기도 하고, 달이 뜨면 달빛에 낙엽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뒤섞인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들은 시인이 낙엽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이다. 낙엽이 주는 즐거움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을 밤 타향에서 나그네 신세로 잠을 자다가 꾸는 외로운 꿈을 깨우는 것도 낙엽이다. 낙엽이 여관방의 창을 두드린 것이다. 또한 님의 왕래가 없어 섬돌에 낀 이끼를 가려주는 것도 낙엽이다. 낙엽이 섬돌에 쌓인 것이다. 이렇게 운치 있고, 고마운 낙엽을 함부로 쓸어버려서야 되겠느냐고 시인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쓸어버리지 않는다고 해서 낙엽이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다. 낙엽에 제일 치명적인 것은 비이다. 가을 어느 날, 문득 비가 오기라도 하면, 시인의 마음은 안절부절 어찌할 줄을 모른다. 텅 빈 산에서 낙엽이 이제 더 할 데 없이, 야위어 버릴까 봐 시인은 안절부절인 것이다. 자신의 일을 가중시키거나, 낙엽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은 낙엽을 보면 보통 실용적이 아닌, 정서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쓸쓸한 느낌을 받기 쉽지만, 달리 보면, 낙엽은 가을의 운치를 생성시키는 비타민 같은 존재이다. 맑은 가을밤에 듣는 낙엽 소리는 인생의 가장 강력한 청량제(淸凉劑)이다. 달빛에 비치는 낙엽 그림자는 삶의 보배가 아니던가?

낯선 곳 여관에서 잠 못 드는 나그네의 외로운 꿈을 창문을 두드려 깨운 것도, 님의 왕래가 없어 섬돌에 가득 피어난 이끼를 가려 덮어 외로움을 달래 준 것도 모두 낙엽이었다. 이쯤 되면 낙엽은 가을이 사람에게 선물하는 비타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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