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테(andante)
안단테(andante)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3.10.28 18: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늦은 밤이다. 걸어가자고 한다. 차를 큰길가에 주차시키고 걷기 시작했다. 시내보다 3, 4도가 낮은 산골이라선지 가을바람이 차다. 집까지는 삼십여 분이 걸리는 길지 않은 오름길이지만 인적 없는 산길이라 밤중에 혼자서 걷는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도로의 불빛이 멀어질수록 어둠은 짙어지고 별이 지천이다. 딸은 무서움도 잊은 채 몇 발자국 걷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나에게 별을 보라고 성화다. 처음 보는 광경처럼 신비한 밤하늘이 걸음을 느리게 하고 늘 급하기만 하던 마음까지 느긋하게 한다. 기분 좋은 시간이다.

풋풋했던 시절, 내게도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사랑을 꿈꾸고 미래의 아름다운 삶을 상상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 내 인생의 밑그림은 지금 이 순간처럼 여유로웠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지니고 다니던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아바의 노래를 들었다. 70년대 초였다.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음악은 작은 충격이었다. 그중에서도 ‘안단테 안단테’ 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운율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후 테이프를 사서 카셋 레코더에 넣고 들었던 노래다. 지금 생각하면 실소를 금치 못한다. 남녀의 사랑행위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노래인데 영어실력이 짧아서 안단테의 가사내용이 그저 천천히 느리게 하는 아름다운사랑이야기인줄만 알았었다. 물질만능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양은냄비처럼 후루룩 끓어 잠시 뜨거운 것보다 시나브로 익어가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 여겼다. 아바의 안단테는 철들지 않아 마냥 행복했던 시절, 나의 로망이 되었었다. 허나 살다보니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삶도 결코 만만한 게 아니어서 아름답고 느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사랑이 찾아 와도 늘 목말라 상처가 되고 먹고 살아야 할 긴급문제는 남보다 앞서가려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했다. 그토록 앞만 보고 달리는 치열한 삶의 여정을 지나왔어도 뒤돌아보면 사랑도 명예도 남은 것이 별로 없는 게 인생이다. 알면서도 조급해지니 이것도 병이지 싶다.

언제부터인지 누가 깨우는 것도 아닌데 자다가도 깜짝 놀라 일어난다.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무엇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다. 욕심 내려놓고 이젠 느리게 가도 누가 뭐랄 것도 아닌데 서두른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속도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주변사람들도 편안할 터인데 아직도 앞만 바라보고 있다. 자신이 점점 버석거려지는 걸 부인하지 못한다. 누추한 삶이 조급증을 일게 하는 건 아닌지.

엊그제는 참으로 우울한 날이었다. 반갑지도 않은데 꼬박꼬박 온다. 한 달도 거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배달되었다고 해야겠다. 어느 달은 두 번씩 온다. 요즘은 생각지도 않던 장소가 찍혀있어서 좋지 않은 시력으로 자세히 드려다 보며 기억을 더듬기도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아무이상이 없었는데 다시 생겼나, 혼자고개를 갸웃하기도 한다. 속도위반범칙금납부서다. 미리 내면 과태료라 하고 금액도 20% 깎아준다. 위반한 킬로수도 제각각이고 그에 따라 금액도 다르다. 게다가 가끔 주차위반도 한다. 잠깐 볼일이라 괜찮겠지 하고 세워두면 영락없이 이틀 후면 고지서가 날아든다. 오백 원 아끼려다 몇 만원이다. 급한 마음으로 인해 받아야 하는 불이득이다.

별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걷는 30분의 시간은 마음에 작은 변화를 일으킨다. 집에 도착해서도 일부러 마당에서 서성이며 산마루에 걸린 달을 올려다봤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안단테가 삽입되어 있는 아바의 CD도 다시 커내 놓았다. 달리지 않아도 내 인생의 겨울이 코앞이다. 내 나이만큼의 속도만 유지한다면 다음 달부터는 속도위반범칙금납부서는 배달되지 않을게다. 대신 교통흐름을 방해한다고 눈총은 받을 것 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