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국
해국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3.10.27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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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기온이 차가워졌다.

부모 품에서 자라던 아이가 새로운 세계로 발을 딛는 관문, 수능도 다가오고 있다. 올 수능시험 날은 포근한 날씨로 시험의 압박감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주었으면 좋겠다.

지지난해 꺾꽂이로 늘려놓은 해국이 피기 시작한다. 작년에는 가냘픈 꽃대를 올려 보기조차 안쓰러웠는데, 올해는 제법 앙증맞게 핀 모습이 신통하다. 땅끝마을 바닷가 바위틈에서 내 이웃으로 시집온 해변 국화 몇 가지를 잘라다 심은 것이다.

전에는 매서운 바닷바람과 짠 바닷물이 흩어지는 흙도 없는 바위틈에서 무척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팔자에 없이 기름진 땅에 옮겨졌다. 뿌리가 내리고 포기를 늘릴 때까지는 해변보다 이곳을 더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기름진 땅에 정성까지 더했건만 해국은 좀처럼 자라주지 못하고 비실비실했다. 아무리 기름진 땅이라 해도 고향을 떠나 환경이 바뀌는 것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해국도 모든 어려움 이겨내고 결국에는 뿌리를 잘 내렸다. 벌써 서리가 내렸는지 이웃의 다른 들꽃들이 하나둘 말라가기 시작하니 줄기 끝에 한 송이씩 꽃을 피우고 있다. 고향 바닷가가 그리운지 남해의 물빛처럼 시린 색이 꽃잎에 서린다. 아름다움 저편에 외로움의 그늘이 스친다.

해국은 세찬 바닷바람이 겨우내 불어와도 말라죽지 않는다. 적당한 기온만 유지되면 줄기와 잎이 살아 견딘다. 원래 살던 곳에서는 커다란 꽃무더기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자란 줄기가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있고 새로운 가지가 나와서 더부룩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반한 사람들이 가져갈 욕심으로 줄기를 잡아당겨 보지만 뽑히지 않는다. 여러 해 동안 쌓아놓은 내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걱처럼 생긴 도톰한 잎에 융단 같은 솜털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추위도 잘 견딘다.

한여름 무더위와 장마를 견뎌내고 고향 바다의 모습을 담아 가을 하늘 속에서 시린 빛깔로 꽃을 피운 것이다. 기다림과 인고의 세월이 해국의 꽃말이라지. 참 잘 어울린다.

이젠 제법 자리를 잡아 수북이 피는 해변 국화를 보고 있으려니 몇 년 전 수능 때 방황하던 아들 녀석이 생각난다. 냉정한 사회로 내던져지는 외로움과 두려움에 갈피를 잡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한동안 방황하던 아들도 이제는 제법 적응하여 어미를 기쁘게 한다.

아무리 힘든 일도 견뎌내면 어디에서나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을 왜 그리 두려워했는지. 녀석에게 수능이란 것은 지금은 아마도 잊혀진 일일 것이다. 두려움과 외로움이 모여 단단한 한 인격체를 형성해 주고, 다시 그것이 모여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시켜 주리라 믿는다.

바다가 고향인 해변 국화는 우리 꽃밭에서 키가 제일 작다. 그런데도 아주 당당하게 가을에서 초겨울까지 연한 보라색으로 꽃을 피운다. 언제나 한결같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정열을 불태우며 이 터에 삶의 뿌리를 튼튼히 박고 희망의 꽃을 천년만년 피워다오. 너를 바라보는 아들도 이런 꿈을 꾸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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