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굼부리와 은백색의 억새꽃
산굼부리와 은백색의 억새꽃
  • 엄갑도 <전 충청북도중앙도서관장>
  • 승인 2013.10.24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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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엄갑도 <전 충청북도중앙도서관장>

제주도 산굼부리 가을억새꽃의 은빛 물결! 그것은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누가 말했던가. 억새꽃은 석양을 등지고 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라고 말이다. 저무는 역광에 윤택한 빛깔을 유감없이 드러내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청명한 하늘이 열린 10월의 아침 햇살을 받아 삽상하고 청량한 바람결에 표표히 나부끼고 있는, 그 넓은 억새밭의 은빛 억새꽃들 또한 감동하리만큼 아름다웠다. 억새 사이사이를 휘젓는 바람결이 그 많은 억새들을 요리조리 한 방향으로 흔들어 춤추게 하고, 그때마다 억새에 부딪히며 내는 바람소리와 새들의 합창소리, 끝없이 일렁이는 찬란한 은빛 물결은 한편의 대서사시를 이루고 있었다. 아름다운 가을이 거기 있었고, 그 아름다운 가을을 지켜보고 있는 시간이 이렇게 편안하고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억새밭 옆으로 산굼부리가 있었다. 이 산굼부리는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마르(marr)형 분화구라 한다. 용암이나 화산재의 분출 없이 열기의 폭발로 암석을 날려 둥그렇게 구멍만 남게 된 분화구란다. 굼부리란 말은 화산체의 분화구를 가리키는 제주도의 말이라고 한다. 그 둘레는 2km가 조금 넘고, 깊이는 한라산의 백록담보다 조금 더 깊은 100m 정도라 한다. 광활하게 펼쳐진 대평원 한 가운데 움푹 패여진 신비의 분화구! 그 엄청난 불기운이 터져 나왔던 태고의 숨구멍에서 잔잔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산굼부리 정상까지 올라와 여유롭게 평원을 바라보며 은빛 갈대꽃 옆에 12명, 초로의 청교교우회 회원들이 서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그루 한 그루 아름다운 억새꽃인양 그렇게 서 있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을 닦는 얼굴들은 아직도 젊어 보이는 데, 이순(耳順)과 고희(古稀)의 중간 여울에 들어선 우리들의 은빛 머리칼이 오늘따라 더욱 빛나고 있었다.

우리들의 인연은 1992년 서울에 있는 중앙교육연수원의 교육행정직 중견관리자 직무교육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때 전국 각 교육기관에서 모인 수료생 중에서 서로 뜻이 통하는 다른 시.도 사람끼리 모여서 영원한 우정을 계속적으로 지속해 나가자는 취지에서 결성된 전국 모임이 이 청교교우회였다. 어느덧 21년의 세월이 흘렀다. 화풍난양(和風暖陽)에 혈기방창하던 젊음을 세월이라는 강물에 흘려보내고 오늘 이렇게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억새꽃인양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시류 따라 유두분면(油頭粉面)하고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이해득실에 얽혀 모였다가 헤어지는 모임들이 그 얼마인가. 우리들의 이 모임은 이해득실과 아무런 인연이 없지 않은가. 오직 평생토록 형제 같은 우정을 영원토록 나누자고 가진 모임으로, 지금까지 순진무구(純眞無垢), 그 아름다운 정을 이렇게 이어오고 있지 않은가. 그 동안 전국 명소들을 주유하면서 말이다. 공직 생활 중에 건진 참으로 값진 보배가 아닐 수 없다.

이번 모임의 유사인 제주에 사는 김행훈씨는 짜임새 있는 2박 3일의 여정에 따라 오늘 이 아름다운 산굼부리 억새밭으로 우리를 안내한 것이었다.

나이 탓일까. 요즘은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어도 감동이 물밀 듯 밀려오는 곳에 서게 되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흥보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여유로워만 진다. 이윽고 그 억새 능선의 평화로운 길을 따라 내려오다 묘하게 만들어 놓은 벤치에 앉아 찬란하게 빛나는 가을 햇살을 담뿍 받으면서 다시 한 번 억새꽃 향에 취해보았다. 그리고 남은 여생 동안 오늘 같은 우리들의 억새꽃향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간망(懇望)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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