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의 향연
가을밤의 향연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10.21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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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사람들은 대부분 가을은 쓸쓸하다고 느낀다.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 때문이든, 또 한 해가 저물어가기 때문이든, 이유를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쓸쓸한 느낌만은 어쩔 수 없다.

사실 쓸쓸한 것은 가을의 풍광일 것이다. 스산한 바람과, 뒹구는 낙엽, 부쩍 차가워진 날씨 등 가을의 풍광들이 쓸쓸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풍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따라서 쓸쓸해지곤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눈을 돌려보면, 가을만이 가지고 있는 운치 있는 풍광들 또한 적지 않다. 당(唐)의 시인 이의(李義)는 가을밤 산속에서 가을 풍광의 진수(眞髓)를 만끽하였는데, 여기에 쓸쓸함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 가을 밤 동산에서(秋夜東山)

林臥避殘暑(임와피잔서) : 숲에 누워 늦더위를 피하고

白雲長在長(백운장재장) : 흰 구름은 끝이 없어라

賞心旣如此(상심기여차) : 자연을 즐기는 마음 이왕 이러하고

對酒非徒然(대주비도연) : 술을 마시는 것도 또한 부질없는 일은 아니로다

月色徧秋露(월색편추로) : 달빛 비추는 데 가을 이슬 듬뿍 내려앉았고

竹聲兼夜泉(죽성겸야천) : 대나무 소리에 샘물 소리 함께 들리네

凉風懷袖裏(량풍회수리) : 서늘한 바람 소매 속으로 불어들면

玆意與誰傳(자의여수전) : 이 느낌 누구에게 전할까

 

※ 시인이 동쪽 산 숲에 들어간 것은 늦더위를 피하고자 함이었다. 물론 시간은 한낮이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가을이 깊어져도 한낮은 더위가 여전한데, 이때 마을 근처 산속 나무 그늘에 들어가면 금세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동산 숲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니 흰 구름이 떠간다.

흔한 광경이지만, 시인은 여기서 자연의 무궁함을 새삼 느끼며, 자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재차 확인한다. 무궁한 자연을 보고 그것을 즐기는 마음은 오래전부터 그래 왔던 터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술을 마시곤 했는데, 이 또한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시인은 토로한다.

가을 늦더위를 피해 숲 속에 들어와 하늘의 구름을 보는 등 자연을 즐기며, 술을 마시고 있노라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한낮의 가을 즐기기도 나름의 운치가 충분하였지만, 아무래도 밤의 운치만은 못하였다. 시인은 뜻하지 않게 산속에서 가을밤의 향연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향연인가?

달빛이 은은하게 숲 속을 비추면 가을 이슬이 숲 속의 모든 사물들을 골고루 적시고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눈의 호사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이것은 가을 밤 향연의 서막에 불과하다.

눈의 황홀경에 뒤질세라, 이번엔 귀가 아우성이다. 바스락 대나무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거기에 밤샘의 물 듣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가을 밤 숲 속의 고요함을 일깨우는 이들 소리는 귀를 황홀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시각(視覺) 청각(聽覺)에 이어, 이번엔 촉각(觸覺) 차례가 왔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시원한 바람이 옷소매 속으로 파고들어 살갗을 간질이니, 세상에 이보다 감미로운 촉감(觸感)은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가을 밤의 향연을 시인은 과연 누구에게 전할지 궁금하다.

가을이 쓸쓸한 사람은 가을 밤 산속에 들어가 보라. 밝은 달에 비친 이슬을 느껴 보라. 눈을 감고 대나무 소리와 샘물 소리의 합창을 들어 보라. 소매에 시원한 바람이 살을 간질이는 것을 느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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