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가끔은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3.10.14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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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비가 내린다.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꾼다. 음악도 끄고 빗소리를 듣는 시간이 평화롭다. 유리창으로 빗방울들이 달려왔다 뿔뿔이 흩어진다.

유리창에 부딪친 빗방울들은 직선으로 유리창을 타고 오르거나 봄날 꽃봉오리 벌듯 순간 피었다 사라지기도 한다. 어떤 빗방울은 다른 물방울과 만나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수직으로 하강한다. 빗방울에게도 만남과 이별, 욕망과 체념이 있다.

얼마 전 <다큐 3일>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당신은 떠났지만 당신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떠나버린 당신과 남겨진 나, 우리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라는 메시지가 기억에 남는다.

일 년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큰딸을 마음에서 보내지 못해 추모공원을 찾는 아버지는 날마다 딸에게 문자메시지를 남긴다. 딸이 마음아파 할까봐 보고 싶다는 심중의 말 대신 ‘엄마 아빠 보고 싶으면 꿈속에 놀러오라고’.

추모공원 전광판에는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메시지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생전에 전하지 못한 마음속의 말들이 애틋하게 흐르고 있었다. 유족에게 휴대폰 문자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그리움의 다리다. 휴대폰을 활용한 상술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절실함이다.

요즘은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다양한 앱이 개발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듯 보인다. ‘밴드’나 ‘카카오스토리’ 를 통해 소원했던 지인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친구들의 근황을 짐작할 수 있어 반갑기도 하다. 나도 가끔은 카카오스토리에 글을 올린다. 친구에게만 공개하다보니 댓글들이 따뜻해 위안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어느 날, ‘00님과 0명이 카카오그룹을 시작했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떴다. 카카오스토리 안에서 또 다른 그룹을 만들어 소통을 한다는 얘기다. 그 후로 그 친구 스토리는 관심에서 멀어졌다. 돌이켜보면 섭섭할 일도 아닌데 소외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소통을 위한 것이 오히려 또 다른 소외를 만들어내는 듯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스마트폰으로 바꾼 뒤 겉도는 말들의 세계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다니는 듯 허전함이 늘어간다. 자유롭지 못하다. 응하고 싶지 않은 초대에도 카카오톡은 상대방의 메시지 확인 여부가 표시되기 때문에 예의상 바로 답을 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고 난 뒤는 늘 쓸쓸하다.

범람하는 말속에 살면서 오히려 말을 잃어가는 느낌이 드는 건 왜 일까. 일상을 전하는 이야기는 쉽게 하면서도 정작 상대방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잘 꺼내지지 않는다. 추모 공원 전광판에 흐르는 이야기들도 대부분 그런 마음들이다. 말의 홍수 속에서 정작 해야 할 말들은 침묵하게 되는 것이 스마트폰 탓만은 아니리라

내리는 비는 멈추고 물방들이 유리창에 머물러 있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정지 상태다. 마주봄이 따스하다. 가끔은 그리 서로를 응시한 채 가슴에 담아 둔 말을 나누는 그런 시간들이 필요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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