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
내리사랑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3.10.13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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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무심코 바라본 앞뜰에 구절초가 초라하게 피었다. 주인의 손이 자주 가지 않아 빈약한 줄기 끝에는 하얀 꽃잎을 한 송이씩 매달고 있다. 오월 단오에는 다섯 마디가 크고 음력 구월 구일에는 아홉 마디가 된다는 구절초가 가지는 제멋대로 구부러지고 꺾여 있다. 꽃이 달린 채 말린 후 달여 먹으면 부인병에 효과가 있다 하여 선모초 라고도 불리는 구절초. 어머니는 손발이 찬 딸을 위해 구절초를 달여 오고는 하셨다. 약용식물 사전에 보면 옛날부터 9월 9일에 채취한 것을 엮어서 매달아 두고 여인의 손발이 차거나 산후 냉기가 있을 때에 달여 마시는 약으로 써 왔단다. 꽃이 달린 구절초가 부인병에 효과가 있다며 달여 주시던 어머니.

편찮으신 후 돌봐 드리긴 했지만 엄마가 내게 준 무한정의 사랑에 비교나 될까? 힘들다고 내밷는 내 말버릇 때문에 적지 않은 상처를 받으신 어머니. 어이없음인지 날 물끄러미 바라만 보시는 어머니가 전에 없이 측은지심이 들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부모는 자식이 못나도 끊임없이 사랑하지만 자식은 그러하지 못하니 씁쓸할 뿐이다. 아들 두 녀석은 어쩌면 구절초를 달여 오시던 엄마의 정성 덕분에 얻었는지도 모르는데. 

위염 때문에 아파서 누워있는 내게 인사돌을 가지고 와선 무조건 내 입에 넣어주었던 그 세 살짜리 아이가 어느새 군인 아저씨가 되었다.

가족들의 간절한 기도와 함께 작은아이가 입대 하던 날, 그날은 큰아이 때와는 더 다르게 입대행사를 했다. 부모는 아들을 군에 입대시키면서 감회를 이야기하고, 입대하는 아들은 부모님 감사에 대해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평소에 어리광만 부리던 녀석들이 그날은 어찌 그리 씩씩하고 철이 든 모습인지 죄다 대견했다.

그중 한 아이 부모 중에 진주에 살고 있다는 어머니가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다. 아이들을 양쪽 손에 쥐고, 엎고, 걸려 나왔다. 세상에 아들만 다섯이란다.

“오늘 큰아들을 입대 시킵니더. 그란데 너무너무 속이 상합니더. 애비라는 사람은 남들 다 가는 입대인데 뭘 둘씩이나 가냐면서 일을 나갔다 아닙니꺼? 인정머리 없는 남편을 아들 대신 군대에 보내고 싶습니더. 그렇지만 나라에서 남편을 받질 않으니 보낼 수도 없고 정말 속 상합니더. 우리 막내가 클 때쯤이면 군대에 안 가도 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십니더.”

훌쩍이면서도 큰소리로 외쳐대는 이 아주머니 때문에 숙연한 행사장은 박수와 함께 잠시 웃음바다가 되었었다. 남편보다도 듬직한 아들을 군대 보내는 아주머니는 아들이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우면 수많은 사람 앞에 나설 수 있었을까? 행사가 끝나자 장정들의 무리가 내무반으로 이동했다. 우리아이는 또래보다 일찍 철이든 녀석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걱정은 덜되었지만,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참고 있던 감정을 울컥한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병장 계급장을 달았다나. 대한의 건장한 남아로 나라를 지키는 일에 나섰으니 어찌 억울하다 하겠는가. 하지만 가을비가 내린 후로 밤 기온이 부쩍 쌀쌀해지니 며칠째 아이 생각이 간절하다.

남들 보내는 유학도 보내질 못했고, 더러 감정의 회초리도 대며 키웠다. 부모 노릇을 잘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탈선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당당하게 열심히 살아가니 소중한 내 아이들이다. 이만하면 자식 자랑하는 우리나라 어머니 축에 들 터, 피식 웃음이 나는데 스마트폰이 울린다.

“엄마! 저 시월 이십사일 나가요.”

이심전심인가. 작은아이의 신이 난 목소리다.

구절초 꽃잎을 딴다. 잘 간수했다가 아이 오는 날, 차 한 잔 끓여 어머니와 함께 마시며 좋은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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