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갈이
분갈이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3.10.06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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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주말에 비가 내렸다. 뜰에 있는 식물이 가을비를 흠뻑 머금고 아침 햇살에 싱싱한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여기저기 마음대로 자란 들풀도 가을이 오며 꽃봉오리를 열기 시작한다.

노란 미역취 옆에 보라색으로 핀 층 꽃의 어울림이 아주 산뜻하다. 초록빛 가운데서 내 눈길을 끈다. 이렇게 가을이 오면 식물들도 서서히 겨울준비에 들어가며 마음은 바빠진다. 그중에 한 가지가 분갈이다.

뜰에 눈길을 돌리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마음이 여러 곳으로 갈라진다. 출근할 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작은 공간에 잡초도 보이고, 단풍나무 옆에 잡풀도 눈에 거슬린다.

여름내 손길 한번 가지 않았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이제 집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낼 수 있어 보도블록 틈새의 잡초, 대문 뒤와 수돗가 옆에 난 풀들도 뽑을 수 있게 되었다. 풀을 뽑으며 꽃밭 옆을 바라보았을 때 잎사귀가 칙칙해진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뽑던 풀을 잠깐 정리하고 몇 년이 지나도 꽃이 피지 않은 정향나무 화분을 대문 옆으로 들고 왔다. 늘 습관처럼 물만 주었지 무관심해 그 나무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아 상태가 어떤지 궁금했다. 화분이 뿌리로 꽉 차서 전혀 움직이지 않아 어찌할 수 없었다. 화분 뒤를 쳐서 쏟아 보려 했지만, 뿌리의 힘으로 화분 밑이 깨어져 없어진 상태였다. 그 틈새로 뿌리들이 아주 가득 차 있었다.

사람도 계절이 바뀌면 주택에 도배도 다시 하고 옷도 바꾸어 입는다. 겨우살이를 준비한다. 식물도 가을이 되면 겨울 준비를 해야 하는데 몇 년 동안 손길이 미치지 못해 분갈이를 제대로 하지 않았더니 화분 밑이 빠지는데 까지 온 것이다. 견디다 못해 잎이 누렇게 변했다. 며칠 전에도 석 곡 화분이 뿌리로 가득 차서 가장자리 부분을 칼로 도려내어 분을 쏟았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제때를 놓치게 되면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해 그 부분을 채워야 한다. 정향나무 화분도 밑이 빠지고 꽃도 영양이 부족하여 초록 잎이 누런빛을 띠고 견디다 못해 이제 죽으려고 잎이 변하는 것 같았다. 얼른 쏟아서 정리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가지고 있는 전정 가위로 우선 화분 가장자리를 손에 힘을 주어 파내니 화분에 붙어 있던 뿌리들이 조금씩 떼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꽉 찬 뿌리와 실랑이하고 나서야 꽃나무를 쏟을 수 있었다. 간신히 쏟아보니 온통 잔뿌리가 흙과 뒤엉켜 큰 덩어리로 되었다. 난 사정없이 가위로 잔뿌리와 길게 똬리처럼 엉킨 뿌리들을 시원하게 잘랐다. 그리고 마사와 부엽토를 알맞게 섞어 새 화분에 심었다. 작은 화분에서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생각하니 그 꽃을 관리하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 옆에 단풍나무 한 그루가 많이 자랐다. 그 나무가 처음 우리 집에 온 것은 오래전에 속리산 가을 등반 때 아주 작은 묘목을 캐다 플라스틱 화분에 심었다.

겨울에 얼어 죽을까 염려되어 벽 쪽에 놓았던 것이 화분 배수구 틈새로 뿌릴 내려 땅의 기운을 받더니 그 안에 자리를 잡아내 키보다 더 크게 자랐다.

한두 해 미루다 때를 놓쳐 제멋대로 자라게 된 것이다. 지금은 플라스틱 화분을 뚫고 땅에 뿌리를 깊게 내려 베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힘이 세졌다.

이렇듯 말을 하지 못하는 식물도 자연 그대로가 아닌 사람 곁에 옮겨 심으면 사람의 보살핌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때맞춰 건강하게 자라도록 관리해야겠다. 분갈이해준 정향나무에 고운 꽃이 피기를 기다린다. 내년 오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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