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L’identite)
정체성(L’identite)
  • 하은아 <충북중앙도서관 사서>
  • 승인 2013.09.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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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권하는 행복한 책읽기
하은아 <충북중앙도서관 사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 속에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은 필요조건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칭하는 것이며, 사회가 만들어졌다고 역사는 이야기한다. 사회이건 국가이건 내가 사는 동네이건 오롯이 나 혼자인 적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늘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여러 집단 속에서 나라는 존재로 살아간다.

그런데 나는 늘 같으면서도 다르며, 다르면서도 같다. 어떤 집단에서는 매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아이이며, 또 다른 집단에선 매우 조용한 아이이다. 제3의 집단에선 나의 다른 모습이 또한 존재한다. 그런 모습들이 모여서 완전한 나로 표현될 수 있지만, 또한 아닐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각인될 때 혼란스럽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휩싸여 내 행동들이 모두 거점ㅃ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한없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다양하게 타인에게 각인되는 내 모습들이 꽤 괜찮게 느껴져 우쭐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늘 생각의 끝은 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사춘기 중학생 소녀가 할 법한 나에 대한 정체성 고민을 아직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다만, 사춘기 소녀 시절에는 나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고민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이다.

도서 ‘정체성’(밀란 쿤데라 저·이재룡 옮김·민음사)은 이런 나의 고민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선택해 읽은 책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여러 개의 가면 속에서 자신들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야 하며, 민얼굴로 살아갈 힘을 키워야 한다”는 한 인문학자의 ‘정체성’ 관련 강의에서 추천을 받았다.

이 책은 상탈이라는 이혼녀와 그녀의 연하 애인 장 마르크의 이야기이다. 남자들이 더 이상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상탈의 이야기를 듣고 장 마르크는 제3의 남자인 척하며 애인인 상탈을 사랑한다고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받고 다시 아름다워지는 상탈의 모습을 보면서 장 마르크는 다시금 사랑을 느끼고, 자신이 만들어낸 제3의 남자를 질투하기도 한다. 밀란 쿤테라는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이런 독특한 인물 이야기 구조로 풀어놓았다.

이 책은 단순히 연애소설이라 생각될 수도 있다. 익명의 남자로부터 연애편지를 받는 여자의 짜릿함과 존재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신이 만들어 낸 남자를 질투하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각각의 시점으로 풀어 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평가되기엔 책장이 넘어가는 순간의 시간이 길다.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자신들의 또 다른 모습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 자신의 가면들이 떠오른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내 가면에 둘러 싸여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하지만, 책 주인공이 그러했듯이 나는 가면들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 무관심한 척하는 가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척하는 가면, 항상 웃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가면들을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내 맨 얼굴을 찾아냈다. 그리고 편안하고 개운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기분이 후련함과 상쾌함을 느꼈다.

상탈과 장 마르크의 연애사건을 통해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 관계를 성장시켰듯이 이 책을 읽고 본연의 내 모습을 다독이고, 타인과 맨 얼굴로 마주할 용기를 가졌다. 사춘기 소녀의 고민의 답을 찾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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