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의 중요성
長의 중요성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3.09.12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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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장은 중요하다. 오늘 말하는 장은 내 몸의 장(腸)이 아니라 조직의 장(長)이다. 그런데 수장(首長)의 역할은 정말로 중요한 것일까?

민주시민으로 태어난 나는 사실 조직의 장이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없지 않다. 하다못해, 때로는 장이 왜 필요하지라는 생각도 한다. 이를테면, 친목모임도 그렇고, 운동모임도 그렇고, 총무 하나만 있으면 되지, 굳이 장을 따로 둘 이유를 찾지 못한다.

총무라는 이름이 거슬릴 때는 좀 거창한 이름으로 바꾸면 된다. 내가 운동하는 모임의 사실상 총무는 ‘구단주’로 불린다. 공을 갖고 하는 모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임이름 자체가 ‘공포의 외인구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총무라고 불릴 때와 구단주라고 불릴 때,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의 자세는 많이 다르다. 전권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구단주 맘대로’다. 만일 내가 속한 구단의 운영을 바람직하다고 본다면, 우리는 회장 없는 조직을 이곳저곳에서 꾸려나갈 수 있을 터이다.

친구들끼리 하는 계모임도 이번 총무가 너무 잘해서, 다들 그냥 ‘만년 회장’하라고 성원이었는데, 이런 경우도 회장이 불필요한 경우였다. 늦게 가는 바람에 회장에게 전화하려고 했는데, 친구들이 모두 회장이 누군지 몰랐다. 말이 총무지 회장보다 나은 총무였기 때문이다. 그 모임은 총무한 사람이 회장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돌아갔지만, 이제는 일원체제로 돌아갈 것 같다.

이렇게 평등한 사회, 민주적인 사회, 동호인 사회는 회장이 불필요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회장을 자꾸 둘까 조직을 이끄는 사람을 ‘서기’(書記)나 ‘비서’(秘書)로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는 왜 비서나 서기를 나쁘게 생각할까? 차를 내오는 여비서, 시골의 말단 면서기 때문인가?

우리 반기문 사무총장도 정식 이름은 ‘총비서’(General Secretary)다. 그런데 우리는 비서를 낮춰보는데 익숙해서 여간해서 그렇게 쓰지 않는다. ‘총장’처럼 장을 붙여야 직성이 풀린다. 사실상 영미권에서 비서는 장관을 가리키기도 하는데도 말이다. 국무장관(the Secretary of State), 국방장관(the Secretary of Defense)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사회는 장에 대한 일종의 편집증이 있는 것 같다. 대장(大將)의 장도 아니면서도 하여튼 장이 되고자 한다. 반장도 장이고, 이장도 장이고, 면장도 장이고, 기관장도 장이다.

만일 우리가 장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비서나 총무, 아니면 서기라고 쓰더라도 그렇게 장에 목매달까? 나 자신을 돌아보더라도, 엉겁결에 ‘사무총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덕분에 순금감사패도 받았지만, 그 이름이 다른 것이었더라도 내가 기꺼워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장은 정말 중요하다. 내 경험이다. 외국생활 중 대사관을 종종 갈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직원의 분위기가 갑자기 변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똑같은 사람인데도, 사무실 분위기가 무표정에서 친절명랑으로 바뀐 것이다. 그때 나는 물어보았다. 대사가 바뀌었냐고.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장이 바뀌면서 직원의 자세도 바뀐 것이다. 그때 나는 장의 중요성을 여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장은 중요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장이 장다우려면 장이라는 이름을 버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충북대학교 ‘서기’, ‘간사’, 아니면 ‘총비서’는 어떤가 장관님은 장(長)에다 관(官)까지 덧붙인 분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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