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설움
나그네 설움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09.0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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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지만, 어느 날 문득 나그네인 나를 발견하는 게 인생 아니던가? 왕후장상(王侯將相)인들 재벌(財閥)인들 별 수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은 참으로 공평하다. 누구나 영원히 살 수 없고, 따라서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잠시 여행을 와서 머물다 가는 것이 이 세상이요, 내 집인 것이다. 당(唐)의 시인 두목(杜牧)은 인생이라는 나그네 길에서 만난 자신의 나그네 신세를 쓸쓸하게 읊고 있다.

◈ 여숙(旅宿)

旅館無良伴,(려관무량반), 여관엔 좋은 친구 없어

凝情自悄然.(응정자초연). 가슴에 엉긴 정이 저절로 쓸쓸해지네

寒燈思舊事,(한등사구사), 차가운 등잔 아래 지난 일 생각하는데

斷雁警愁眠.(단안경수면). 외로운 기러기에 놀라 잠을 깬다

遠夢歸侵曉,(원몽귀침효), 새벽이 되어서야 먼 꿈에서 돌아오고

家書到隔年.(가서도격년). 해를 넘기고 나서야 집 편지가 다다른다

滄江好煙月,(창강호연월), 푸른 강은 안개 쌓인 달이 있어 좋고

門繫釣魚船.(문계조어선). 문에는 고기잡이배가 매여 있다

※ 홀로 객지를 떠돌던 시인이 잠시 묵고 있는 객사(客舍)엔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다. 평소 가슴 속에 엉긴 채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凝情)이, 집을 떠나자 저절로 쓸쓸하게 나타난다. 객사(客舍)의 텅 빈 방에 켜 놓은 등잔불이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 그만큼 쓸쓸하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차가운 등잔불을 켜 놓고 있노라니, 지난 옛일들이 모두 그리워진다. 집 떠나기 전에는 그저 일상의 사소한 일이었던 것들이 객지를 떠돌다 보니 새록새록 그리워 진 것이다. 그리고 가을 하늘을 수놓는 기러기 떼를 떠올리면서 시인은 가족 생각이 더욱 절실해진다. 온 가족이 무리지은 기러기 떼에서 자신만 홀로 떨어져 나온 기러기(斷雁)는 외롭기 그지없는 시인 자신의 초상(肖像)이다.

이처럼 외기러기 신세가 된 시인은 이런저런 근심에 잠들기가 쉽지 않은데, 어렵사리 잠든 것도 외기러기 모습이 어른거리자 깜짝 놀라 깨어버리고 만다. 밤마다 멀리 있는 집을 꿈꾸다가(遠夢)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온다고 한 것은 시인이 얼마나 외롭고 집이 그리운 지를 운치있게 묘사한 것이다. 집에서 부쳐 온 편지(家書)가 해를 넘겨서야 온다고 한 데에는, 시인이 집안 소식을 하루라도 빨리 듣고 싶어하는 조바심이 잘 나타나 있다. 집을 떠난 외로움에 흠뻑 취해 있던 시인은 현실로 돌아온다. 시인이 머물고 있는 객사(客舍) 근처에 있는 강에는 안개 속으로 달이 떠 있는데, 그 모습이 아름답다. 객사(客舍)의 문에는 고기잡이배가 매어 있다. 고요한 휴식의 시간인 밤을 묘사한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밤의 모습에서 위로를 얻고자 하지만, 외로움과 그리움은 어쩔 수가 없다.

집을 떠난 사람만이 나그네 인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나그네일 뿐이다. 다만, 집을 떠나고 났을 때, 자신이 나그네 신세임을 더욱 절실하게 느낄 뿐이다. 외로움과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 나그네 병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인간의 무모한 탐욕을 경계하는 약이라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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