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짓는 소리
밥 짓는 소리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13.09.0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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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요란하게 울려대는 알람소리에 눈을 뜬다. 몸은 천근만근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 듯 무거운데 띠리릭 소리는 기어이 주인을 일으켜 세워 놓고서야 조용해진다. 신경을 긁어대는 소리가 나라고 좋을까마는 혼자의 의지로는 이른 시간에 일어날 수가 없다. 이렇게라도 알람소리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온가족이 아침을 굶고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세상에 많고 많은 좋은 소리를 두고 하필이면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로 내 아침을 알리는 소리로 선택했을까 의아해하다가 문득 어린 시절 정겨웠던 소리가 떠올라 눈을 감는다.

내 유년의 알람 소리는 어머니가 부엌에서 밥 짓는 소리였다. 아궁에 불을 지피며 내는 나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부지깽이로 토닥토닥 불을 다스리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귀를 쫑긋 방바닥에 붙였다. 그러면 부엌에서 온갖 소리가 구들장을 타고 들려왔다.

그때부터 나의 오감은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톡.톡.톡 소리가 나면 엄마가 칼등으로 마늘 다지는 소리고 착.착.착.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나면 그것은 야채를 써는 것이다. 찢어진 창호지 틈으로 구수한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오고 스윽 쇳소리가 나면 엄마가 밥이 잘되었는지를 솥뚜껑을 밀어 확인하는 소리였다.

이때부터 엄마의 손길이 더욱 분주해지는 때다. 달그락 달그락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식구 수대로 숟가락 젓가락 헤아리느라 나는 소리는 내가 그만 방바닥에서 귀를 떼고 일어나야 된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지금은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추억의 소리가 되어버렸음에도 웬일인지 나는 여전히 엄마의 밥 짓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듯하다.

어머니의 밥 짓는 소리는 나의 오감을 자극하고 감성을 키우는데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도 훌륭한 연주였다. 지금도 심신이 지치고 힘이 들 때마다 살며시 눈을 감고 어머니의 밥 짓는 소리를 떠올린다. 그러면 일상에 지쳐 나른했던 온몸에 생기가 도는 듯하다.

어머니가 가족들을 위해 밥을 짓던 그 정성과 사랑이 구들장을 타고 올라와 상처 난 마음을 보듬는다. 어머니의 밥 짓는 소리는 나를 치유하는 힐링의 소리이다. 그래서 언제나 행복하다.

딸들이 자고 있는 방문을 열어본다. 아직도 한밤중이다. 여러 가지 문명이 내는 여러 소리에 익숙해진 아이들이다. 어쩌면 훗날 우리 딸들은 부엌에서 밥 짓는 소리를 압력밥솥이 김을 내뿜는 소리와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게를 보며 도마를 내려놓는다. 마늘을 두 쪽으로 가르고 칼등으로 톡.톡.톡 다지고 일부러 야채를 착.착.착 소리를 내어 경쾌하게 썰어본다. 내가 밥을 지으며 유일하게 낼 수 있는 아날로그인 이소리가 훗날 우리아이들이 떠올리며 나처럼 행복해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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