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여행기
백두산 여행기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3.09.01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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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한 여름 인데도 부드러운 바람을 안고 도착한 백두산꼭대기에 그날은 눈이 덜 녹았다. 잔설이 큰 바위 군데군데 하얀 무늬로 남아 있어 누워 있는 얼룩말처럼 보였다. 장백산을 오르는 길은 무척 꼬불거려 우리를 실은 지프차는 덜컹덜컹 아슬아슬 곡예를 하는 통에 17명의 일행은 바짝 긴장했다. 능선으로 오르자 감개무량하게도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백두산 천지! 말로는 다 표현 할 수 없는 수많은 빛깔의 물빛과 그 맑음, 둘레의 능선이 하도 아름다워 꿈을 꾸는 듯했다. 백두산 천지는 그 모습을 쉬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절경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오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안개 옷을 입은 채 곁을 주지 않는 천지 앞에서 안타까워하다가 발길을 돌려야 한다. 천운인가, 행운인가. 천지가 우리에게 온전한 모습을 다 드러내 보여주었다. 천지의 경관에 감격스러워 하는 사람, 절경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 아무 말 없이 그저 긴 한숨을 내쉬는 사람 등. 우리는 천지의 기를 온몸으로 가득 받았다.

그 와중에도 철망을 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 더구나 이곳 안내원들은 한글로 된 안내표지판을 자꾸만 뽑아버린다고 했다. 한글 표지판은 천지가 북한 영토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터, 그런데 한글 표지판은 점차 뽑혀나가고 한자로 된 장백산 표지판만 남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다가 백두산의 이름은 사라지고 장백산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갑자기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철망 너머 저쪽으로 가면 북한 땅이라는데…. 우리는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서 여기에 왔다. 중국 땅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올 수 있는 날은 언제 오려나. 기약도 없고 막연하지만 그런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비룡폭포로 향했다.

백두산에 있는 장대한 장백폭포를 멀찌감치 서 바라보았다. 수많은 산봉우리가 기슭을 따라 병풍 모양으로 천지의 삼면을 둘러싸고 있고 북쪽의 트인 곳으로 물이 가파르게 흐른다. 물살이 빨라서 먼 곳에서 보면 하늘을 오르는 다리를 연상하게 하여 사람들은 이를 <승사하>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승사하는 장대한 폭포를 이뤄 암벽을 때리며 떨어졌다. 이 폭포는 겨울에도 얼지 않고 계속 흘러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한다. 폭포가 내려오는 물살에 손을 담가 보았다. 얼음처럼 차가와 손이 시렸다. 우리 일행은 서로의 행복한 얼굴들을 폭포와 함께 카메라에 담고 용정으로 향했다.

독립운동가 들이 모여 항일투쟁을 논의하면서 독립의지를 불태웠던 역사적인 자리이기도 한 일송정, 지금도 산 정상에는 그 소나무 한그루가 독야청청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용정시를 굽어보고 있었고 아래로는 두만강 지류인 해란강이 생각보다 초라했지만 유유히 흐르며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다음날 일행은 흙탕물빛 두만강에 떠있는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뱃사공의 재치 있는 말솜씨가 잠시 귀를 즐겁게 해주었지만 김정구의 두만강 가요가 흘러나오니 저쪽의 군인 두 사람이 몸을 드러내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짠했다. 아마도 신호였나 보다. 6·25전쟁 드라마에서나 봄 직한 아들또래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도 손을 흔들며 답례를 하였다. 이 작은 동작 하나에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은 한 핏줄이면서도 만날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인가. 중국인들이 <도망강>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두만강의 찬바람을 뒤로하고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교로 향했다.

어두운 시대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 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비석에 새긴 서시를 읊었다.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잊혀진 시대, 이미 모두에게 의미를 상실한 시대의 청년 동주는 우리 마음에서 빛나는 꺼지지 않는 별이었다. 무서운 고독의 어두운 창살에 갇혀 조국광복의 밝은 햇빛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시인 동주. 당시 세상은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으로서 자유롭게 시집을 출판할 수 없었던 시대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판되면서 그는 일제 말 암흑기를 대변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우리 곁으로 왔다. 그것은 동주의 친구 <정병욱>이 일제의 눈을 피해 그의 어머니에게 맡긴 동주의 원고가 잘 보관된 덕분이기도 하다. 마룻바닥을 뜯어 원고가 손상되지 않도록 명주보자기에 꼭꼭 싸서 잘 보관해주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시인 윤동주를 영원히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둠을 거부하면서 한 시대의 양심을 노래하며 짧은 생애를 살다간 시인 윤동주. 그러나 한 여인의 슬기 덕분에 윤동주 시인은 우리와 후손의 가슴에서 영원히 살고 있는 것이다.

일제에게 천재시인 윤동주를 잃어버린 우리. 아직도 남의 땅을 통해서만이 백두산을 갈 수밖에 없어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한여름 백두산여행길은 초봄의 꽃바람이 불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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