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점찍기
돈에 점찍기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3.08.2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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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서양문화가 들어오면서 변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옷이 대표적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넥타이를 매고 다녔는지 모르지만, 예의를 차리는 데 그것이 빠지지 않는다. 서양인들은 재킷을 거치는 데 더 신경 쓰지만, 우리는 점퍼 차림이라도 넥타이를 매는 것을 예의로 안다. 그래서 무더위에도 격식을 차리려면 넥타이를 매야 한다.

또한 요즘 젊은이들이 어법에서 조심스러운 것은, ‘예’와 ‘아니오’를 때로 서양식으로 한다는 점이다. 우리말에서 부정어법으로 물으면, 대답이 기준이 아니라 물음이 기준이다. “오늘 학교가지 않았지?”라고 물으면 “네, 빼먹었어요”라는 대답이 옳다. ‘not’을 ‘no’로 대답하는 것은 분명히 서양식이다. 그런데 “재미없지?”라고 물으면 “예”라고 대답하는 친구도 있지만, 가끔씩은 “예, 없어요”가 아니라 “아뇨, 없어요”라고 대답하는 경우도 있다. 뒤에 ‘없어요’가 붙으면 문제가 없지만, ‘아뇨’라고만 하면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돈 없어?”라고 물을 때 이제는 “응”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없어”라고 대답해야 정확한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손짓도 그렇다. 이제는 거의 사라졌지만, ‘오라’는 표시를 손바닥을 바깥으로 해서 흔들면 ‘가라’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이제는 많이 서구화가 되어, 우리식 욕이 서양식으로는 신의 가호를 비는 십자가 형태의 ‘굿 럭!’(Good luck)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우리문화는 가운데 손가락 하나만으로는 별다른 뜻이 없었는데, 가끔씩 칠판에 쓴 것을 가운데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교실이 웃음과 더불어 술렁거린다. 사람을 가리킬 때 예전처럼 아무생각 없이 썼다가는 원한을 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아직 나는 가운데 손가락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히 없다. 미국에서도 살아봤지만 태생은 쉽게 못 바꾸는 모양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나를 괴롭히는 것은 숫자를 어떻게 해야 확실하게 표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현재 공문서는 이제는 통일이 된 듯한데, 모든 단위를 천원 곧 영이 세 개가 될 때마다 쉼표를 찍는다. 이를테면, 1,000,000 이렇게 말이다. 이제는 익숙해서 쉼표가 두 개면 1백만 원이라는 것을 쉽게 안다. 아홉 개면 세어봐야 알지만 말이다. 얼만가?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이 된다. 그렇게 큰돈을 만져보지 못해서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도 않지만 말이다. 예산표를 만들 때도 불필요한 영을 떼버리기 위해서 ‘(단위 천원)’으로 대부분 통일되었다. 그런데 10여 년 전만 해도 만원 단위로 끊기도 했다. 백만 원 예산이라고 할 때, ‘(단위 만원)’으로 표기하고, ‘30’, ‘5’, ‘65’이렇게 썼던 것이다. 이렇게 쓰면 간단하고 보기도 좋다. 천원단위 예산서를 쓸 일은 요즘 물가 시세로는 거의 없다.

자, 여기서 묻자. 우리 어법에 맞는 것은 천원 단위일까, 만원 단위일까? 한자문화권의 셈법은 분명히 만원 단위다. 보라. 일, 십, 백, 천, 만 이후에 만원을 기반으로 말한다. 만원, 십만 원, 백만 원, 천만 원, 그리고 다시 억으로 옮아간다. 억, 십억, 백억, 천억, 그리고는 조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전통셈법은 쉼표를 네 단위마다, 영이 네 개씩 될 때마다 점을 찍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말도 줄어들고, 눈에도 잘 들어온다.

그러나 서구화된 이후, 쉼표를 영이 세 개씩 될 때마다 찍고는, 기괴하게도 ‘10천원’이라고 읽는다.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영어로는 만원을 ‘십천원’(ten thousand)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지만 말이다. 이러다가는 한 세대가 지나면 ‘엄마, 나 15천원만 줘’라고 이야기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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