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밤에 나 홀로
초가을 밤에 나 홀로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08.26 1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봄이 빛깔로 온다면, 가을은 소리로 온다. 대낮 숲속의 매미 소리가 부쩍 커진 것은 여름과 가을의 교체를 재촉하는 예고이다. 달밤에 우는 풀벌레 소리는 자연의 가을맞이 합창이다. 여기에 오동나무를 위시한 낙엽 소리는 가을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흐느낌 아니던가 초가을 밤에 홀로 있게 된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심사(心思)는 과연 어떠하였을까?

◈ 초가을 밤 나 홀로(早秋獨夜)

井梧凉葉動(정오량엽동) : 우물가 오동나무에 서늘한 잎 나부끼고

隣杵秋聲發(인저추성발) : 이웃집 다듬질은 가을 소리를 낸다.

獨向下眠(독향첨하면) : 홀로 처마 밑 방에 들어가 잠들었는데

覺來半牀月(각래반상월) : 깨어보니 침대 반쪽에는 달빛이 비추고 있네

※ 역시 가을을 알리는 것은 오동나무이다. 집 안 마당 한켠 우물가에 심어져 있는 오동나무는 넓은 잎으로 그늘을 만들며 여름 나기의 도우미 노릇을 톡톡히 해낸 터였다. 바로 그 오동나무의 낌새가 수상하다. 유난히 창백한 모습인가 싶더니, 찬 바람이 나기까지 한다. 언제까지나 우물가에서 여름 더위를 누구러뜨릴 것만 같았는데, 무언가 이상 조짐이 생긴 것이다. 여름의 무더위와는 거뜬히 맞서던 오동나무 잎은 가을이 천적이다. 천적 앞에서 오동나무 잎도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여름을 넘기며 기진(氣盡)한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는 소리에 가을을 감지한 아낙네들은 갑자기 마음이 분주해 진다. 곧 추워질 날을 대비하여 그간 장롱 속에 넣어두었던 옷가지를 꺼내 손을 봐둬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멀리 타향에 나가 있는 남편을 기다리는 절절한 그리움이 다듬이 소리에 배어 있는데, 여기저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는 다름 아닌, 아낙네들의 가을맞이 합주(合奏)인 셈이다. 오동나무 잎 소리, 이웃집 다듬이 소리에서 가을을 음미(吟味)하던 시인은 아직 이른 시각이지만, 처마 밑으로 방에 들어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문득 깨어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유난히 가을과 잘 어울리는 달이 시인의 침대 절반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잠들기 전에 귀로 느꼈던 가을을 잠이 깬 후엔 눈으로 느꼈던 것이다. 잠든 사이 살며시 침대 머리까지 찾아온 것은 단순한 달이 아닌, 가을빛을 띄고 하늘에서 온 손님이었던 것이다. 오동나무 잎에서 시작하여, 이웃집 다듬이 소리를 거쳐, 침대에 비친 달빛을 끝으로 시인의 가을맞이는 그 의식을 마감한다. 이처럼 가을을 맞이한 시인의 소회(所懷)는 어떠하였을까? 자세히 묘사는 되어 있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흐르는 기조(基調)는 외로움이다. 시인은 가을의 외로운 속성을 시인 자신의 고독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외로운 가을을 시인은 혼자서 맞이하고 있으니, 외로움은 배가(倍加)될 수밖에 없으리라.

계절은 어김이 없다. 무더위가 여전한 날 스르르 떨어진 오동나무 잎엔 이미 가을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멀리 길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이웃 아낙네들의 다듬이 소리에는 기다림의 염원이 실려 있다. 자신도 모르게 침대 한켠에 찾아 온 달빛은 가을이 짙게 채색되어 있다. 누구라서 가을이 오는 것을 싫어할까만, 문제는 외로움이다. 생명의 조락(凋落)이 귀로 들리고 눈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세월의 무상함 또한 가을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해서 꼭 가을을 앓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 대한 순응을 통해 성숙된 삶의 자세를 기르라고 말하는 것도 가을 아니던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