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의 필재 박광우 거사비(去思碑)
강릉의 필재 박광우 거사비(去思碑)
  • 박상일 <충북문화유산연구회 회장·청주대 교수>
  • 승인 2013.08.2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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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박상일 <충북문화유산연구회 회장·청주대 교수>

청주의 개신동 일대는 약 오백년 전부터 상주박씨들이 세거하여 살아오고 있는 집성촌이다. 상주박씨는 사벌국왕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서 19세손 박광보(朴光輔)가 청주에 이주해 살면서 청주의 세거성씨가 되었다.

상주박씨가 배출한 많은 인물 가운데서도 박광우(朴光佑)가 두드러진다. 그는 공조좌랑을 지낸 박린의 넷째 아들로서 자는 국이(國耳)이고 호는 필재(畢齋)이다. 1519년(중종 14)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그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항의의 뜻으로 궁궐에 나아가 곡(哭)을 하다가 축출당하여 상처를 입자 옷을 찢어서 머리를 싸매고 당시 나이 젊고 글씨에 능한 참판 이찬과 첨지 김로에게 붓을 잡게 한 후 조광조의 신원 상소문을 불러 쓰게 하였을 정도로 절의가 있었다.

1525년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는데 을사사화로 하옥, 이어 유배되던 중 장독으로 인하여 돈화문 밖에서 죽었다. 그 후 율곡 이이가 청주목사로 재직하면서 상소하여 신원되었고, 이조판서로 추증된 데 이어 정조 때 정절(貞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묘소는 본래 경기도 파주에 있었는데 1977년 청원군 남이면 수대리로 이장하여 충청북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고, 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따로 민속자료 제6호로 지정되었다.

청주에서 을사명현으로 잘 알려진 박광우의 행적은 강릉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 강릉부사를 지내면서 치적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장으로 지역 문사들과의 교우가 두터웠던 결과일 것이다.

신사임당의 친정집이며 율곡의 생가로 유명한 오죽헌의 몽룡실에 그가 쓴 시가 새겨져 있고 이외에도 해운정과 선교장에도 그의 시문이 판각되어 오늘에 전한다. 그리고 강릉향교의 인근에는 거사비(去思碑)가 비각 속에 보존되어 있다.

1개의 비석에 강릉부사를 지냈던 구수담(具壽聃) 박광우 양사언(梁士彦)의 이름을 함께 새긴 비석인데, 이들 3인은 모두 조선전기의 사림파로서 문장에 밝았고, 청주양씨인 양사언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유명한 시를 남긴 인물이며 조선 4대 명필 중 한 사람이다.

한 비석에 세 사람의 공적을 새긴 것도 이례적인 일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선정비’나 ‘영세불망비’라 쓰지 않고 ‘거사비’라 새긴 것이 특이하다. 3인의 사후에 강릉지역 사람들이 이들이 남긴 공적과 학행을 추모하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비석은 현재 강릉 명륜고등학교 뒤쪽 음습한 언덕에 방치되어 있는데다 비각의 기와는 일부 흘러내리고 지붕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을 정도로 초라하다.

강릉시 당국자는 비석만을 오죽헌이나 관아공원에 옮겨 세우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한다. 안될 일이다. 비석도 중요하지만 백여년 전에 건축한 비각도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므로 함께 보존해야 한다.

문화재는 원위치에 보존되고 원형을 유지해야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 강릉부사를 지낸 3인의 공적을 함께 기린 거사비는 매우 희귀한 것이므로 문화재적 가치도 충분하고 향토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단지 관리하기 편하고 많은 사람이 관람할 수 있다는 이유로 다른 비석들과 함께 열병하듯이 세워진 비석들 속으로 이전하는 순간 이 거사비의 진정한 가치는 훼손될 것이다.

후손 문중에서는 마땅히 거사비 보존에 앞장서고 학술기관에 의뢰하여 거사비의 역사적 가치와 보존방안을 연구하고 선양한 다음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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