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별꽃
여름 별꽃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3.08.18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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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는 정겨운 우리 민요 속 도라지. 여름 꽃, 별처럼 생긴 흔하디흔한 백도라지 꽃이 피었다. 풍선처럼 부풀은 꽃망울이 만개하면서 내 마음 속에서 추억과 깊은 여운을 불러일으키게 해주는 백도라지 꽃이 관상용으로 몇 포기가 피었다.

키가 한길쯤 자란 하얀 도라지꽃들 속에 드물게 자주 꽃이 석 박아 피어 일상에 지친 눈을 시원하게 한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분홍색 도라지 꽃 한 송이도 흰색도 보라색도 아닌 모습이 부끄러운지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다.

도라지는 들꽃이며 유용한 채소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꽃말처럼 반만년 우리 곁에서 손색이 없는 먹을거리로 남아있는 식물이다. 새콤달콤하게 만든 고추장에 갖은 양념을 넣고 오이와 함께 무치면 쌉싸름한 도라지 특유의 맛과 어울려 한여름 입맛이 없을 때 최고의 반찬이다.

도라지라는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예쁜 우리말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더불어 길경이라는 한약 이름으로 인후통, 치통, 설사, 편도선염, 거담, 진해, 기관지염에 쓰인다. 지난겨울 감기에 걸려 도라지 말린 것에 생강 대추를 넣고 끓여 마시고 효과를 보기도 했다.

이처럼 식용약용으로 쓰임은 물론 도라지 타령에서 볼 수 있듯 민족의 한과 애환이 녹아든 만큼 시린 색깔로 피어나는 꽃이다. 

할머니께서 자주 가셨던 도라지 밭이 그려진다. 도라지 밭을 매실 때는 마치 깊은 산골에 별이 떨어져 별 밭을 매는 듯한 선녀의 모습 같았다. “어쩌면 너희 할머니는 엉덩이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밭을 매시니” 어머니 말씀이 쟁쟁하다.

하얀 모시 저고리 입으시고 쪽진 머리 다듬으며 마루에 앉아 광목에 풀 먹이던 할머니 모습도 떠오른다. 농사짓는 분이어도 워낙 깔끔하셔서 자신의 속옷은 매일 삶고 할머니 방에 먼지 하나 없이 해놓고 여름 홑이불과 모시저고리는 항상 풀을 먹였다. 어쩌다 손녀가 봉숭아물을 들이는 날은 손톱에서 매듭이 빠져 풀 먹인 광목이불에 군데군데 빨간 천연염색을 들여 놓을 때도 있었지만. 

연일 폭염이 이어지니 진저리나게 덥다. 입추가 지나면 모기란 놈도 주둥이가 삐뚤어진다고 했는데 더워서인지 주둥이는 더 야물어진 것 같다. 한방 물리면 퉁퉁 부어오르고 소름이 돋친다. 어릴 적에는 모기장을 치고 사각거리는 홑이불을 덥고 할머니와 잤다. 세상에 그리 편안하고 포근했던 잠자리가 어디 있었을꼬.

옛날이야기처럼 6.25 때 북한인민군이 와서 밥을 달라고 하여 밥도 주고 여러 가지 도와줬었다는 섬뜩한 실화로 여름밤을 오싹하게 만들어주시기도 한 할머니를 유독 좋아했었다.  

찐득하고 더운 날들을 잠시나마 도라지꽃이 시원함을 느끼게 해 주니 고마운 꽃이다.

유년시절 여름이 되면 온 식구가 마당에 멍석 깔고 둘러앉아 모깃불 피워놓고 연기를 따라 심신산천 밤하늘에 별을 세었던 그 여름밤 일도 그립게 해 주니 말이다. 잠시나마 할머니와의 신선한 추억으로 더위를 식혀본다.

할머니를 닮은 백도라지 꽃, 아름다운 여름 별꽃이라고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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