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끝이 아닌 시작… 반전인생으로 행복 일구는 사람들
은퇴, 끝이 아닌 시작… 반전인생으로 행복 일구는 사람들
  • 충청타임즈 기자
  • 승인 2013.08.13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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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막 행복하십니까
◈ "즐거운 삶 사는게 훌륭한 노후대책"

언론인서 약초연구가로, 기타리스트로 - 김익교씨(62)

약초 연구만 몰두 하다

40여년만에 음악 다시 시작

연주가·강사로 '화려한 생활'

지난 2004년 충청일보 편집부국장으로 퇴직한 김익교씨는 인생 2막을 넘어 3막에 도전하고 있다.

20여년을 기자로 재직하다 퇴직 후 청원 연꽃마을에 은거하며 약초연구가로 활동하던 그는 3년전 기타리스트로 변신,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인생 고비고비마다 변신을 거듭한 이유에 대해 “너무 퇴직을 일찍하고 10년을 전원생활을 하면서 각박하게 살았다. 촌에서 약초만 갖고 노니까 건강이 나뻐졌다”며 “노동의 강도는 높아지고 체력은 떨어지고, 가만히 생각하니 이렇게 사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 했던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들려줬다.

또 “사회 일선에서 물러나 고향에 칩거하다시피 약초 연구에 몰두한 것도, 기타를 다시 손에 잡은 것도 다 이유가 있지 않겠냐”며 “인생살이가 억지로 되는 것도, 하고 싶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물 흐르듯 흘러오다 보니 인생 2막을 지나 3막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실력 있는 기타리스트도 연주하기 어렵다는 ‘벤처스’음악을 들고 2012년 첫 개인 공연을 한 그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녹슬지 않은 연주 실력을 자랑한다.

다시 기타를 잡으면서 연습으로 하루를 보낼 만큼 열정과 고된 훈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연주가로 활동 반경을 넓힌 그는 청주문화원 동아리연합회장으로 취임하며 일렉기타 연주가로, 기타 강사로 화려하게 인생 3막을 열고 있다.

오는 27일에는 충주에서 열리는 2013세계조정선수권대회에 청주시 공연팀으로 초대돼 공연도 할 계획이다.

김 회장은 “중학교 때 처음 기타를 접하고 대학교에서 그룹 활동을 했지만 군 제대 후에는 기타를 잡지 않았다”면서 “나이 들어 다시 기타를 잡게 될 줄은 나 자신도 몰랐다”고 웃음 지었다.

또 “농사짓는 것과 음악 하는 것하고는 정신적으로 다르다. 하고 싶었던 거 하니까 재미있다”면서 “요즘 음악은 디지털 음악인데 반해 벤처스 음악은 아날로그식 음악으로 소리가 섬세하다. 연주하다 보면 머리와 손을 많이 쓰니 정신 건강에도 좋다”고 예술론을 폈다.

주변인조차 놀랄 정도로 인생 반전을 보여주고 있지만, 기타 연주가로 무대에 서기까지 ‘자신에게 충실한’ 삶에 터닝포인트를 맞췄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반전을 꾀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들은 조기 퇴직 후 경제력이 없으니 산에 다니거나 운동하거나 술 마시고 논다”며 “연금을 받아 여유가 있어도 전후세대들은 죽어라 일만 하던 세대라 돈 쓰는 법을 모른다. 현실이 불안해 쥐고 있지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지 않는다. 병에 걸리면 그만인데…”라며 안타까워했다.

김 회장은 또 “나이 든 사람들이 더 옹졸해진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넓히고, 우울해지지 않으려면 새로운 것에 자꾸 도전해야 한다”면서 “100세 시대라지만 양보다 질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조했다.

은퇴를 앞두고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나이들수록 일을 벌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긴 시간을 그냥 놀 수만은 없는 것 아니겠느냐”며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예술이 좋다. 색소폰을 배우거나 노래교실에 참여해 나만의 시간을 갖고 즐겼으면 한다. 내가 즐거운 삶을 사는 것도 훌륭한 노후대책이다”며 예술로 시작하는 인생 2막을 권했다.

/연지민기자

◈ "늦깎이 배움 열정… 어린시절 꿈 실현"

은행원서 화가로 제2의 인생 시작 - 배영희씨(52)

자녀 본보기 되고파 대학 등록

미술공부 8년만에 첫 개인전

작품활동·봉사 삶의 큰 활력

은행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배영희씨는 20여년 직장생활을 마감하며 사표를 썼다.

일하는 여성들이 가사와 육아 문제로 겪는 힘겨운 직장생활도 이유였지만 ‘나는 지금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어 과감하게 던진 사표였다. 그렇다고 딱히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도 없었다고 한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사표를 내면서도 내가 잘하고 있는건가 고민했다”는 배 작가는 “20년을 돈을 벌지만, 재미가 없었다. 더구나 몸이 아프면서 직장생활이 싫어졌다. 사표를 낸 후 어떻게 할 것인가도 미리 걱정하지도 않았다”며 워킹맘으로 살았던 직장인의 힘겨운 경험을 들려줬다.

자연인으로 돌아온 그녀는 가장 먼저 자녀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예술에 소질이 있는 딸들은 화가가 되고 싶었던 엄마의 어린 시절 꿈을 다시 꿈꿀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기보다는 엄마가 먼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대학교에 등록했다”는 그녀는 “서원대학교 3학년에 편입해 미술을 공부하고, 2008년에는 석사과정으로 진학해 전문 예술인으로 가기 위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자녀교육과 배움에 대한 열망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실마리가 되었고, 인생 2막처럼 전업 작가로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한 배경이 되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부모가 보여주면 된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녀들은 은연중에 보고 따라한다”는 배 작가는 “늦은 나이에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을 때,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후 그녀는 8년 만인 지난 6월 첫 개인전을 청주예술의전당 전시실에서 가졌다. 예술인으로, 전업작가로 첫발을 뗀 셈이다.

배 작가는 “개인전을 마치고 나니 마음이 무겁다. 작업에 대한 욕구도 커지고 혼이 담긴 작업을 해야겠구나 하는 책임감도 든다”며 “어린 시절 꿈을 펼치며 미술에 대한 갈증을 풀기도 하지만 예술은 자기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타인과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힐링이다”라고 전했다.

예술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는 그녀는 예술과 함께하는 지금이 더 없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늦깎이지만 꼭 하고 싶었던 작업인데다 창작의 희열로 이어져 행복이 배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은 기계처럼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면, 그림을 그리는 지금은 내가 주체가 되어 생각하고 그 느낌을 화폭에 옮긴다”며 “내 삶의 주인공은 나란 생각이 생활에 커다란 활력을 주고, 비로소 내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즐겁게 작업한다” 들려줬다.

배 작가는 인생 2막을 시작하며 봉사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동미술 자격증을 취득한 후 기관을 방문해 글쓰기와 미술을 접목한 아동지도로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것도 나이가 주는 여유다.

“그동안 나와 가족을 위해 살았다면 인생 2막은 내 삶을 즐겁게 만들면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그녀는 “사회에서 얻은 다양한 경험을 사회봉사로 환원한다면 이 역시 값지고 의미 있는 인생 2막의 삶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연지민기자

◈ "건강악화로 절망… 글 쓰며 희망 생겨"

회사원서 작가로 새로운 도전 - 손화일씨(67)

동맥경화로 쓰러진뒤 몸 불편

걷기재활중 우연히 강좌 신청

글쓰기 매진… 10월 새책 출간

한일시멘트에서 25년 근무하다 IMF로 퇴직한 뒤 용역업체에서 일하다 지난 4월 퇴직한 손화일씨. 평생 짊어지고 왔을 가장의 몫을 내려놓고 글 쓰는 일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이력만 본다면 평범한 사람과 다름없지만, IMF로 정리해고 된 후 다시 일터를 잡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더구나 2003년 동맥경화로 쓰러진 뒤 손씨는 다시 걷지 못할 것 같은 불안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하루에 3갑을 피울 정도로 담배를 즐겼고 술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혈관이 막히면서 동맥경화로 쓰러지게 됐다”는 손씨는 “두 다리 모두 힘줄을 연결하는 수술을 받고 한달간 입원해 있었는데 다시 걷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대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덮쳤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직장에서 다시 직장으로 우회하다 절망과 부딪힌 손씨지만 인생 2막을 위한 새로운 만남은 우연한 기회로 찾아왔다. 퇴원 후 걷기 재활을 시작한 그는 2007년 청주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1인 1책 만들기 플래카드를 보게 된 것이다.

“집에 갇혀 살지 않으려니 매일 동네 주변을 걸으며 재활을 했다. 그러다 1인 1책 만들기 플래카드를 보고 그 자리에서 글쓰기 강좌를 신청했다”며 “한일시멘트에 재직할 땐 사보에 많은 글을 게재했을 정도로 글 쓰는 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고서는 글 쓰는 일을 잊고 있었다가 그날 이후로 다시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절망의 시간을 걷고 있을 때 삶을 희망으로 바꿔 준 것은 글 쓰는 일이었다. 밤이고 낮이고 글 소재가 떠오르면 컴퓨터 앞에 앉아 글쓰기에 몰입했다.

유년의 기억과 툭툭 불거져 튀어나오는 시상까지 손씨에겐 모두 희망의 증거였다. 자신이 걸어온 삶을 산문으로, 때론 시와 동시로 풀어놓으며 글쓰기에 매진할 수 있었다.

손씨는 “직장을 은퇴하면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며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쓰러지고 난 뒤 건강이 여의치 않아 시골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글을 쓸수 있어 행복하다”며 “올 10월에는 새로운 책도 출간할 예정이다”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처음 책을 출간했을 땐 아내와 주변 사람들 모두가 칭찬해주더니 지금은 책을 출간해도 반응이 시큰둥하다”면서도 “그래도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몰입하게 되고, 그로 인해 행복하다. 이제 애니메이션으로 작업할 수 있는 글에 도전할 계획이다”고 들려줬다.

아직도 장거리 외출이 불편한 손씨는 “내 삶은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며 “그래도 집보다는 밖에서 시간을 보내려 노력한다”고 말한다. “나이가 많으면 주변에 친구가 없어진다. 남자들은 특히 경제 일선에서 은퇴하고 나면 좌절감만 커지고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더 두려워진다”는 그는 “그래도 자신을 위해서 밖으로 나가라고, 도전하라고 들려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노후를 준비없이 맞이한 이들에게 손씨는 “능력에 맞는 일,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보길 권한다”며 “건강을 잃고 죽고 싶었을 때 글 쓰는 일이 힘이 되어준 것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노후라도 의미있는 인생 2막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지민기자

◈ "초라한 노년 싫다면 자격증 취득부터"

공무원서 공인노무사로 변신 성공 - 송영권씨(61)

명퇴 후 개업… 치열하게 경쟁

4년만에 충북 최대업체 우뚝

시 낭송가·노년 코치 활동도

공무원 생활 33년3개월을 뒤로하고 지천명의 나이에 인생 2막을 위해 명예퇴직 후 현재 공인노무사로 살아가는 송영권씨(B&K 휴먼 노사연구원 원장). 그는 노년의 삶은 세상에 둘도 없는 블루칩이라고 말한다.

송 원장은 고등학교 졸업 후 1974년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고용노동부에서 국가공무원으로 일을 했다. 남들보다 열심히 열정적으로 살던 2004년 6월 30일 그는 충북지방노동위원회 사무국장을 끝으로 명예퇴직을 했다.

정년을 10년 남겨둔 시점에서 동료들은 왜 힘든 길을 가느냐며 명퇴를 말렸지만, 그는 정년 후 삶을 일찍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공직을 미련없이 떠났다.

명예퇴직을 하기 전 퇴직 후 삶을 위해 그는 공인노무사 자격증을 취득해 놓은 상태였다.

송 원장은 “힘들다고, 불행하다고 인간의 마음대로 생략할 수 없는 인생의 후반전은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누구에게는 행복일수도 또 누군가에게는 재앙이 될수도 있다”며 “인생 2모작 시기를 나이 50을 기준으로 삼았고 용기와 열정, 자신감이 남아있을 때 시작하자는 생각에 공직을 떠났다”고 말했다.

퇴직 후 2년 뒤 2006년 5월 그는 B&K 휴먼 노사연구원을 개업했다. 공무원 신분일 때는 갑이었던 그는 개업 후 을의 입장에서 죽을 힘을 다해 살아야 했다.

개업 당시 그의 나이 52세. 경쟁자인 다른 공인노무사들의 나이는 30대. 경쟁에서 지기 싫었다. 지인들에게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는 죽을 힘을 다해 살아야 했다. 개업 4년 뒤 송 원장은 충북 도내 최대 업체로 우뚝 섰다.

송 원장은 “자문 기업 확보를 위해 찾아간 업체에서 정문부터 제지를 당하는 것은 물론 사무실에서 나의 전직을 생각해 상사를 소개시켜줄 법도 하지만 주임이나 대리 선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수모도 겪었다”며 “개업 초기 공무원 시절을 잊지 못해 갑 같은 을로 살면서 힘들었지만 마음을 비우고 철저히 을로 살면서 자문기업이 차츰 증가했다”며 말했다.

개업 후 워크홀릭이라고 불릴 만큼 일에 빠져 살았던 그는 지난해 폐업을 고민할 만큼 건강이 나빠졌다. 그의 나이 60에 일어난 일이었다.

건강이 회복된 뒤 우연히 접한 시낭송을 통해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이후 공인노무사 외에 시낭송가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노년의 삶을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100세 준비 코치로 활동하며 조언해 주고 있다.

송 원장은 “공무원 동기들이 요즘 퇴직을 앞두고 있는데 노후 준비를 일찍 시작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며 “노년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노후에 무슨 일을 하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 먼저 밑그림을 수도 없이 고쳐 본 다음 전문지식과 식견, 자격증 등을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송 원장은 이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나도, 주변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도록 스마트하게 살고 싶다”며 “나이 70이 되면 마음을 토닥여 줄 수 있는 그런 시를 낭독해주는 개인방송국을 운영하고 싶은 게 꿈이다”고 말했다.

/김금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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