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77년 … 노래로 실향의 삶 위안 "고향 충북 그립다"
이주 77년 … 노래로 실향의 삶 위안 "고향 충북 그립다"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3.08.13 1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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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8주년 중국 정암촌을 가다
1936년 日강제 이주로 정착
청주아리랑 소리의 맥 잇는 곳

세대별 고향에 대한 생각 달라
귀환·취업 한국行 100명 이상

오는 8월 15일은 대한민국 광복 68주년이다. 사람 나이로 치면 광복을 맞은 지 환갑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일본의 잔행이 역사의 증거처럼 남아있는 곳이 있다. 중국 연변의 정암촌이다.

1970년대 한국의 시골집을 옮겨놓은 듯한 정암촌은 2000년대 청주에서도 잊혔던 청주아리랑이 실향의 아픔처럼 소리의 맥을 잇고 있어 유명해진 마을이다. 하지만, 그곳엔 사무치도록 그리운 고향땅을 살아생전 밟지 못하고 죽거나, 마음속 고향으로 남겨둔 채 살아가는 충북 이주민들이 있다.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남쪽 고향을 잊지 못하고 살았을 정암촌 사람들. 구성진 노랫가락에 고향산천이 떠오르고, 한숨처럼 터져 나오는 노랫말에 그리운 사람들의 숨결을 담아 입에서 입으로 부르던 청주아리랑은 고달픈 삶에 위안과도 같은 샘물이었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면서 단절된 시간만큼 고향의 기억마저 아스라이 멀어지고 있는 정암촌. 청주아리랑노래처럼 이주 1세대에서 2세대, 3세대로 흘러가고 있지만 정암촌 사람들에게 고향은 1936년 그날의 기억으로 멈춰져 있다. 이에 세대마다 변화하고 있는 고향 충북에 대한 애틋한 기억을 들어보았다.
1세대 "고향은 … 가고 싶어도 갈수 없는 곳" 2세대 "고향은 … 희망의 땅" 3세대 "고향은 뿌리 … 가보고 싶어"

◇ 이주 1세대 정암촌 사람들

1936년, 하늘만 빠끔한 정암촌에 충북의 이주가구 80호가 마을에 정착한다. 땅을 일구고 수확이 많아지면 다시 찾을 줄 알았던 고향은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멀어졌다. 그렇게 가슴에 묻어두고 까맣게 잊힐 즈음, 1992년 정암촌에는 학술연구차 임동철 충북대 교수가 방문한다. 당시 400여 명의 조선족이 살았던 정암촌에는 이주민들이 고향을 그리며 불렀던 청주아리랑이 충북의 소리로 맥을 잇고 있었고, 충북 출신 사람들이 이주지가 알려지면서 충북도는 2001년 정암촌 사람들을 초대해 고향방문을 선물한다.

이주 1세대로 당시 충북을 방문했던 신순호(77·여) 할머니는 “60년 만에 고향을 처음 방문했다. 2001년 꿈에 그리던 고향을 가게 되어 무척 설렜다”는 신 할머니는 “그때만 해도 젊었으니까 돈 벌어서 한국에 살고 싶었다. 해서 2003년 취업비자로 충북에 와서 일하다 다시 정암촌으로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신 할머니는 정암촌으로 돌아간 이유에 대해 “고향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고, 지금은 늙었다”면서 “정암촌에는 집도 있고 농사지을 땅도 있으니 이제 이곳에서 남은 삶을 살아야지 않겠냐”고 했다.

서강숙(83·여) 할머니는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정암촌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고향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서울 미리내 시장에서 2년 정도 일해서 돈을 벌었다”는 할머니는 “역시 고향 사람들이 친절하고 좋더라. 세 딸은 국적을 회복해서 지금 한국에 살고 있다. 가끔 연락하고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제는 너무 늙어서 한국에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솔직한 심정을 들려줬다. 60년 세월이 건널 수 없는 또 다른 강을 만들어 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 이주 2세대 정암촌 사람들

부모에게 고향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었다면, 이주 2세대들에게 고향은 희망의 땅이다. 60년 만에 교류가 시작되면서 코리아 드림은 정암촌에도 불어닥쳤다. 해마다 한국으로 취업해 떠난 사람이 늘면서 정암촌을 지키는 사람의 수도 적어지고 있다.

2006년 충북도가 추진했던 정암촌 사람들 농업연수로 고향을 방문했던 장창규씨(남, 42세)는 이주 1세대들과는 달리 한국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보은 장안이 고향인 신성훈씨(53)씨는 “한국에서 살고 싶은데 친척의 보증이 있어야만 주민등록을 만들 수 있다”며 “내 아버지 고향에서는 왜 받아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어떻게든 한국에 살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암촌 부녀회장인 김미자씨(48·여)도 “2009년 농업연수로 충북에 다녀왔다”며 “연수에서 배웠던 것을 갖고 현재 정암촌에서 고추장, 된장을 담그는 공장을 운영하려고 시작하다가 여의치 않아서 중단된 상태지만 잘 운영해서 연길 등 도시로 판매하고 싶다”고 소박한 소망을 전했다.

리연제씨(57·여) 역시 2008년에 농업연수로 충북을 찾은 적이 있다. 리씨는 “한국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 취업비자를 기다리는 중이다”면서 “우리는 국적이 중국이다. 한국에 가고 싶어도 정암촌에서 살아야 한다”고 이주 2세대로의 고민을 털어놨다.

◇ 이주 3세대 정암촌 사람들

이주 3세대에게 고향의 의미는 무엇일까. 부모의 고향이라는 단순한 뿌리 외에는 사실상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더구나 일을 찾아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정암촌에는 학생 수도 급격히 줄고 있다. 현재 소학교 학생 7명과 초·중학생 9명에 불과하다.

연변대학과학기술대 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리란(20·여) 학생은 할아버지 고향이 옥천이다. 그래서 인지 고향에 대한 기억보다 중국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다. 리란씨는 “고향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한국은 가보고 싶은 곳이고, 고향과 왕래가 잦았으면 한다”면서 “정암회(회장 임동철)에서 매년 정암촌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어 고향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 한국에 나와 있는 정암촌 사람들

고향으로 귀환하거나 취업을 위해 한국에 나와 있는 정암촌 사람들은 100명이 넘는다. 고향을 찾아왔지만 오랜 세월 뿌리내리고 산 정암촌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한국에 나와 있는 강영숙씨(62·여)는 “정암촌 사람들이 한국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면서 “서로 안부도 묻고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모임을 서울에서 가졌는데 50세 이상 된 정암촌 사람 86명이 모여 ‘중국 길림성 양수진 정암촌 봄맞이 대축제’ 행사를 했다”고 들려줬다.

또 “이중 20여 명은 고향 친척의 초청으로 주민등록을 회복했고, 한국 사람과 결혼을 해서 온 사람도 있다”고 말하고 “정암촌을 잊지 말고 서로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을 나누자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며 고향 사람들의 끈끈한 정을 확인시켜줬다.

◇ 중국 연변 정암촌의 역사

1936년 일본 강점기에 있던 조선은 일본의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만주로 이주하는 민족 대이동이 진행됐다. 당시 이주 집행기구인 만척주식회사는 1년에 1만 가구 강제 이주계획에 따라 조선인을 만주로 보낸다. 이때 충북에서도 청주, 옥천, 보은, 충주, 괴산 등지의 농가 180호가 만주행 이민 열차를 탄다. 강제로 고향을 등진 이들은 사흘 만에 함경북도 온성역에 닿았고, 두만강 건너 만주땅에 들어섰다. 그중 100호는 왕청현 하마탕향에 정착하고, 80호는 왕청현 춘방촌 서백툰림에 정착한다. 이국땅에 정착하면서도 고향을 잊지 못했던 서백툰림 사람들은 1949년 서북쪽에 있는 정자바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을 ‘정암촌’으로 부르고, 구슬픈 청주아리랑에 실향의 마음을 담아 노래로 위안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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